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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나무 야그/신 문 기 사

문상금 - 비 온 뒤 아침의 단상 - 20060910

by 오름떠돌이 2006. 9. 10.

비 온 뒤 아침의 단상(斷想)


문상금 / 시인 

2006년 09월 10일 서귀포신문

 

       ▲ <삽화 / 이왈종 화백>

 

간밤엔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장대비가 쏟아졌다. 잠든 애들이 혹시나 놀라 깨어 날까봐 서둘러 창문을 닫고 커튼으로 가렸다.


딸애들은 가장 편안한 저마다의 모습으로 깊은 잠을 자고 있다. 간혹 꿈이라도 꾸는지 얼굴 표정이 펴졌다 찡그렸다 한다.


비 그친 뒤 출근길은 분주하지만 아주 상쾌하다. 코 끝을 스치는 공기도 더 신선해졌고 길가의 은행나무와 활짝 핀 나팔꽃 간혹 보이는 분홍 무궁화, 커다란 호박꽃도 물방울을 머금은 채 함초롬히 고개 내밀고 있다.


간편한 옷차림에 모자를 쓰고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는 중로(中老)의 부부가 보인다. 아침결에 나란히 아마 운동하고 돌아오는 길인

   

것 같은 그 부부의 정겨움이 따뜻하게 전해져 부럽기조차 하다.


이젠 아침 운동을 시작해야할 텐데 하면서도 차일피일 미뤄온 게 벌써 몇 년 째이다.


새벽이라든지 특히 새벽 첫 차라는 의미는 매번 설레고 새롭다. 치기가 시퍼렇던 어린 시절, 무언가 세상을 향해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었던 그 때, 새벽 첫 차를 탔었다. 목적지가 어디랄 것도 없이 무작정 나선 길이었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가 신물이 날 무렵 삼양 어디쯤 내려 길 따라 걷다가 비구니들의 도량인 불탑사가 눈에 띄자, 들어가 녹차를 한 잔 얻어 마셨다.


거기서 탑신을 깎아 붙이며 다섯 번 지붕을 얹은, 구멍 뚫린 제주의 현무암으로 쌓은 은 국내 유일의 불탑(보물 제1187호)을 만났다. 오랜 풍우에 퍼런 돌 옷 껴입으며 불탑사의 5층 석탑은 그렇게 오랜 기다림으로 서 있었다. 어디서 어떻게 왔느냐고 물어보지도 않던 그 비구니의 해맑은 미소, 참 신비스러웠다.


그 날의 그 싸늘했던 새벽 공기의 감촉과 돌아올 때 내 마음인 양 짙은 자줏빛으로 불타올랐던 삼양의 석양을 내 영혼 한 구석에 오래도록 보물처럼 묻어두었다.


쭉 뻗은 도로 한가운데 무언가 시커먼 게 보인다. 간혹 보이는 깔린 고양이일까. 살짝 피하고 지나치는데 그것은 바로 두꺼운 운동화 한 짝과 양말이다.


속도를 늦춘다. 우리가 착용했던 의복은 바로 우리 몸의 일부와 똑같은데 누가 일부러 버린 것 같지는 않고 참 궁금하다. 먼지투성이 도로 위, 이리 치이고 저리 뒹굴며 조금씩 형체를 잃어가는 것들에 축축한 연민이 드는 건 왜일까.


버려지는 것들이 너무나 많은 세상, 여름 휴가철엔 수 십 만 마리의 애완동물들이 무관심 속에 길거리로 버려진다. 병들고 늙은 우리의 부모들도 차츰 무관심 속에 잊혀져 가고 유행 지난 물건들도 온갖 쓰레기로 버려지는 요즈음, 도로 위 운동화 한 짝처럼 버려져 사라지지 않기 위하여 부단히 갈고 닦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