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의 가을은
시인 문상금
<삽화 이왈종화백>
맑고 푸른 하늘 아래 꽁지 빨간 고추잠자리 한 마리 날지 않았다. 워싱턴 야자수 너머로 작은 산새 한 마리 날지 않았다. 구름 한 자락 한라산 넘어가고 더 이상 바람도 깃들지 않았다.간혹 거짓말처럼 산꿩이 울어대고 서편 하늘은 유독 붉어져서 지상으로 바다로 가만히 내려섰다.
10월 23일부터 27일까지 4차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열리는 중문관광단지 나의 일터에는 때아닌 살벌함으로 인해 지극히 평화롭던 이 곳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성큼 다가오던 가을은 저만치 물러나 한라산 영실 단풍이나 지천으로 물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여러 중요한 정상회담이 열렸었던 중문관광단지는 그 동안 보석처럼 빛을 발했던 평화 이미지는 잠시 접어두고 가을 땡볕 사이로 전경들의 방패가 비늘처럼 날카롭게 반짝거렸으며 길거리에 줄지어 선 노란색의 깃발들은 제주인의 한(恨)을 간직한 채 휘날리는 산자락의 억새들처럼 펄럭였고,농민들의 머리를 질끈 동여맨 붉은 머리끈은 심장의 동맥들처럼 강렬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연이은 시위, 인터뷰,기자회견,삭발식,삼보일배 등이 성난 파도같은 함성들과 분노에 싸인 채 파란 하늘 아래 떠돌았다.
가을날 삼보일배(三步一拜)는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기에 걷는다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있기에 절한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의 찬성과 반대를 넘어
이렇게 아름다운 시위
가장 겸허한 마음으로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
소망 하나 노란 깃발로 펄럭이면
피멍 든 무릎으로 절룩이는 하늘
진정으로 서럽다
등짝에 내리쬐는 가을 땡볕이
그리고 시(詩)들은 태어났다. 어느 한 곳 중심(中心)에 뛰어들 수 없었던 나는 단지 현장을 맴돌며 멍든 언어의 비밀인 시(詩)를 서너 줄씩 써내려갈 뿐이었다.
드디어 한미 FTA 4차 협상이 종료되는 날, 서귀포 시내 칼호텔과 천지연 공연장에서는 ‘평화의 섬,제주를 노래한다’란 주제로 1박 2일 전국 시인 축제가 열렸다. 지독한 아이러니, 일터인 중문관광단지의 살벌한 분위기와 순수와 자유의 몸짓이 넘쳐나는 전국 시인 축제 두 곳을 다 경험한 나로서는 잠시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금새 아름다운 시낭송의 세계로 젖어들었고 ‘사는게 뭣산디’하며 뚜럼 브라더스의 노래를 따라 불렀다.
정말 사는게 아니 살아가는게 뭣산디, 갈수록 세상살이는 팍팍해지고 한 치 앞을 내다볼 수가 없다. 결국 우리의 몸짓들은 다를지라도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높고 푸른 하늘 마음대로 날아다닐 수 있는 권리와 자유 그리고 생존권을 확보하려는 것일 것이다. 바람이 거셀수록 더욱 꼿꼿이 서는 억새들처럼, 허공 향해 한 번 크게 소리치고 세상살이에 시퍼렇게 열려버린 우리의 가슴을 수습해 단단히 꿰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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