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나무 이야기
시인 문상금
2007년 01월 11일 서귀포신문
삽화 이왈종화백
심한 몸살을 앓았다, 밤새도록. 그것은 발 끝에서부터 심연모를 떨림이 되어 온 몸을 흔들더니, 심지어 내 영혼까지 송두리째 흔들어댔다.
겨울나무가 되고 싶었다. 늘 겨울나무를 꿈꾸었던 때가 있었다. 바람 불고 눈보라 속에 맨몸으로 서 있던, 그러나 눈부시고 당당하게 서 있던 한라산 중턱의 겨울나무들, 그 길들여진 외로움과 기다림.
그러나 그 겨울나무 속에는 봄나무와 여름나무 그리고 가을나무가 들어있음을 나는 알았다. 어쩌면 그 겨울나무처럼 나도 자신을 이겨내며 여러 가지 모습으로 새로워지며 단단히 뿌리내리고 싶다는 그런 꿈을 꾸었던 것은 아닐까.
차를 몰고 근처에 산이 없어 늘 외롭다는 고근산(孤根山) 근처를 달리고 있었다. 길가 가로수로 식재된 겨울나무를 보았다. 놀랍게도 그것은 바로 천연기념물 제163호인 담팔수 나무였다. 며칠전에 가지치기를 했는지 군데군데 하얀 속살을 드러내며 그러나 당당히 서 있었다. 늘 푸른 잎을 매달고 있었기에 맨몸의 한라산 중턱의 겨울나무와는 완연히 다른 느낌이었는데 그 날은 유독 내 발목을 잡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니 담팔수는 낯선 나무가 아니었다. 자주 찾는 천지연 폭포 주변에서 늘 익숙하게 보았던 것이었다. 상록 교목인 담팔수는 6월경에 낙엽이 졌고 낙엽기에 든 늙은 잎은 홍색을 띠므로 항상 녹색과 홍색이 섞여 있는 것을 자주 보았던 것이었다.그리고 9월엔 검은 열매가 달려있곤 했었다.
며칠 후, 소한 추위에 서귀포엔 오랜만에 탐스런 함박눈이 소복소복 내렸다. 창을 열고 마당 잔디밭을 하얗게 뒤덮고 있는 눈을 황홀히 바라보다 문득 담팔수나무가 떠올랐다. 따뜻한 옷을 챙겨입고 나무한테 가보기로 했다. 하필이면 이런 추운 겨울에 가지치기를 한 것일까. 몸에 바람이 들어 몸살이 나는 것은 아닐까. 투덜대며 달려간 그 곳에는 그러나 담팔수는 눈부시게 당당히 눈보라를 맞고 있었다. 하얀 속살을 드러내었던 상처엔 어느 새 푸르딩딩 짙은 회색으로 놀랍게도 복원되어 있는 것이었다.
--- 창 밖 공한지 겨울나무
아아, 너는 참으로 당당히 서 있구나
네 굳은 심지 하나로
깊은 겨울 속의
희디흰 뼈같은 울음을 그 불울음을
파시시 파시시 한 줌의 재로 날리는구나
창 밖 공한지
내가 이름없는 잡풀이 되어
바람에 쓸릴 때
겨울나무는 오늘도 눈보라 속에 서서
더 강력한 폭풍을 기다린다 ---
오래전에 쓴 내 詩 <겨울나무.1>이다. 이 작품에서 나는 내면 깊숙히 내재해 있는 고통과 절망을 극복코자하는 의지와 대결의식을 나타내려고 하였다. 그것은 앞으로 닥쳐올 어떤 환난과도 당당히 맞서 싸워 이기겠다는 강건한 의지의 표출이며 나를 외압하는 것들에 대한 투항의식의 투영이며 주어진 현실에 결코 굴종하지만은 않겠다는 집념을 강하게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 안녕, 네가 안타까워 한달음에 달려왔다가 오히려 위로와 끈질긴 생명력을 전해받고 돌아간단다. 이젠 몸살 따위랑 어떤 절망이랑은 훌훌 털고 일어날게. 새삼 깨달았어.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정말 아름답다는 걸. 고마워, 눈부신 나만의 겨울나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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