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봄날의 단상(斷想)
문상금
2007년 04월 13일 서귀포신문
벚꽃 눈이 내린다. 분분히, 기쁨 하나 슬픔 하나 작은 절망 하나 꽃샘 추위와 모진
바람을 뚫고 꽃봉오리들은 하루 사이 활짝 피어났다. 그리고 사나흘 이 세상에서의
짧은 소풍을 끝내고 한 잎 두 잎 내 머리에 어깨에 구두 위로 툭 툭 떨어져 뒹군다.
집 앞 골목의 벚꽃 눈들을 밟으며 딸애들은 “다녀오겠습니다”재잘대며 걸어서
학교로 간다. 가까운 거리는 아니지만 운동 삼아 걸어서 등교시키고 있다.
아침 7시 30분, 모두들 떠나고 나까지 출근해버리면 집안은 온통 적막만이 감돌고
간혹 벚꽃 눈이 떨어지는 소리만 허공에 날릴 뿐이다.
그 적막을 깨고 맨 처음 집에 돌아오는 건 막내딸이다. 학교 공부 끝나면 곧장
컴퓨터 방과후 그리고 피아노와 붓글씨를 공부하고 귀가하는 것이다.
조금 있으면 큰 딸애가 귀가해 동생을 돌보고 둘째 애는 셈 학원을 더 다니는 터라
6시가 되야 집으로 돌아온다.
간혹 안타까운 마음도 들지만 학교 끝나고 남는 시간을 집에서 챙겨줄 엄마도 없는데
그냥 내버려둘 수도 없는 일이다.
그리고 애들도 커감에 따라 욕심이 있는 애는 스스로 배우고 싶은 학원은 보내달라고
부탁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은근히 대견스러우면서도 열심히 다닐 수는 있는지
피곤하지는 않을지 중간에 포기하지는 않을지 등등 다짐을 받고 보내기도 하는 것이다.
경우야 어찌되었든 학교 끝나고 내내 학원 순례하고 저물녘 무거운 책가방 둘러메고
축 처진 뒷모습으로 귀가하는 애들을 생각하면 눈부시던 봄도 순식간에 사라지고
눈물 나도록 안쓰러워지곤 한다.
맘 놓고 뛰놀 수도 뛰놀 친구도 없는 요즈음의 아이들, 시절이 하 수상하여 함부로
집 밖에 놔둘 수도 없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지난 토요일엔 온 가족이 김정문화회관에서 있었던 ‘로보트 태권브이’를
관람하였다. 애들은 엄마아빠가 초등학교 때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영화를 다시 같이
볼 수 있다는 게 신기하고 이해가 잘 안 가는 모양이었다.
오랜만에 축축한 감회에 잠겨들었다. 집집마다 텔레비전이 넘쳐나는 오늘과 달리
저녁 먹고 온 동네 사람들이 텔레비전이 있는 집으로 우르르 몰려들어
마치 잔칫집처럼 울고 웃으며 연속극을 보곤 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가난했음에도 서로 믿으며 의지했던 그리고 소박한 정(情)이 있었던
어린 시절이었다. 그리고 그 추억 속엔 아릿한 아픔 같은 것, 그리움 같은 것이
배어있어 항상 우리를 겸손하게 굽어보도록 하는 것이다.
또 창 너머로 벚꽃 눈이 내린다. 그것들은 허공에 시(詩)가 되어 분분히 내린다.
간절한 기도가 되어 내린다. 부디 이 벚꽃이 다 지기 전에 우리 지승이를 건강하게
돌아오게 하여 주소서. 지난 삼월 언제부턴가 간절히 기도하지만
아무런 소식이 없어 너무 안타깝다.
딸애들과 제주시 터미널과 이마트에서 전단지를 나누어주며 제보를 부탁할 때만 해도
금방 돌아오리라 생각했었는데, 벌써 달이 바뀌고 봄이 무르익었다.
부디 무사한 모습으로 돌아오기를, 이 눈부신 봄날을 눈부시게 뛰놀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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