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무덤
문상금
2008년 03월 15일 서귀포신문 webmaster@seogwipo.co.kr
며칠 기세등등하던 돌풍과 빗발을 잠재우고 3월의 햇살이 지극히 평화로운 봄날, 마침내 눈부시도록 찬란한 봄이 오고 만 것이다. 겨우내 묵혔던 옷가지와 방안의 먼지를 털어내려고 집안의 窓이란 窓은 전부 열어놓았다. 상쾌한 바람사이로 새싹들의 간지러운 비명들이 비릿함으로 뒤섞여 들어온다. 춥다고 우리가 어깨 웅크릴 때에도 그것들은 부지런히 끈질긴 생명력을 줄기로 잎으로 퍼 나르고 있었던 것이다.
▲ 삽화/ 이왈종화백
안 그래도 고단한 인생살이에 먼지는 왜 이렇게 많이 생기는 걸까. 장롱 위에 책장 사이에 내려앉은 먼지들을 털다 그만 주저앉아 버렸다. 마치 먼지들의 말없는 저항 속에 내가 갇혀버린 느낌이었다. 특히 무더기로 쌓여있는 책 윗부분에 차곡차곡 쌓여있는 먼지들, 그것은 바로 책들의 무덤이었다. 한 달이면 스무 권 정도의 시집이며, 수필집, 각종 문학지들을 전국 각지의 글 쓰는 분들로부터 받곤 한다. 저서를 내면 어떻게 주소를 알아내는지 서귀포에 꼭꼭 숨어있는 나에게까지 보내주시는 그 분들이 눈물겹도록 고맙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날부터 생겨버린다. 바쁘단 핑계로 우편물 정리를 차일피일 미루다 보면 그것들은 뜯겨보지도 못한 채 며칠 몇 달을 얌전히 기다리고만 있는 것이다. 결국 내 게으름의 결과다. 해가 갈수록 서재며 방 한구석에 쌓여가는 책들, 한 작가의 고뇌와 불면과 투명한 영혼이 빚어낸 소중한 책들이 그 소중한 가치만큼이나 얼른 읽어주지도 못하는 주인을 만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닌 것이다.
제일 불만에 찬 사람은 내 남편이다. 온 집안을 책으로 채울 거냐며 제발 정리해 도서관에라도 기부하라고 성화가 여간 아니다. 그래서 재작년에는 ‘사랑의 책 보내기 운동’에 몇 박스 정리해 보내기도 했다. 정리하는 것도 말처럼 쉽지가 않다. 원래 조그만 추억이나 사연이 깃들어 있는 편지나 일기장, 온갖 잡동사니들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내 성격 탓도 있겠다.
내가 두 권의 시집 “겨울나무”와 “다들 집으로 간다”를 낼 때도 그랬지만 이제 세 번째 시집을 준비하면서 그 동안 쓴 詩들을 탈고(脫稿)하고 밤을 하얗게 새우며 제목을 정했다 번복하기를 수십차례, 마침내 인쇄되어 세상 속으로 갓 태어난 반짝거리는 시집을 껴안을 때의 그 가슴 벅차오름이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나와 똑같은 설렘에 밤을 하얗게 새웠을 또 다른 저자들을 위해서라도 단호하게 책들을 정리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정말 책 한 권을 펴내는 것은 한 아이를 출산하는 것과 똑같다고 할 수 있겠다.
몇 권의 시집들을 꺼내어 본다. 송상시인의 시집, “애벌레는 날마다 탈출을 꿈꾼다”이다.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다. 바로 우리의 마음과 일상을 대신 표현해 주는 것 같다. 무한한 일탈을 꿈꾸면서도 결국 제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애벌레들, 우리의 모습들.
멀리 서울에서 보내온 유희정 시인의 “설앵초 은은한 향기” 란 시집 속에서 시인은 조용히 그러나 끊임없이 한번뿐인 삶에 대한 강한 애착과 긍정적 인식으로 자신에게서 출발한 사랑을 더욱 확산시켜 가정에서 이웃으로 또 사회로 조금씩 그 폭을 넓혀가고 있음을 엿볼 수 있었다. 서울의 임지현시인의 네 번째 시집 “누가 시간을 쓸고 있는갚에서는 각박한 도시 생활에서 만나는 여러 가지 사연들, 사람들, 풍경들, 가재도구들 그리고 서울을 떠나 우리나라 곳곳을 여행하면서 보고 생각하는 감회가 시적 번득임으로 가득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안상근 시인의 “바람 사이로 흘러내리는 시간” 시집에서는 저녁 햇살 한 톨만으로도 배부른 바람처럼 살고 싶은 시인의 마음이 잘 표현되어 있었다.
먼지들을 털어내고 말끔해진 책장에 책들을 꽂으며 내 아이들을 어루만지듯 하나씩 어루만져본다. 눈물이 다 난다. 이 예리한 감수성들을 이 순수(純水)를 어찌 모두 정리해 버릴 수 있겠는가. 내 게으름이 또다시 책의 무덤을 만들지라도 나와 맺은 좋은 인연으로 끌어안고 평생(平生)을 가야할 수밖에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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