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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나무 야그/신 문 기 사

[스크랩] 문상금 - 벚꽃 아래에서 - 20080501

by 오름떠돌이 2008. 5. 21.

벚꽃 아래에서

 

                                                         문상금(2008년 5월  1일 서귀포신문)

 

                                                               < 삽화  이왈종 화백 >

 


 창(窓) 너머, 깊은 내 마음의 창(窓) 너머 눈이 내린다. 파릇한 잔디 위로 돌 위로 눈꽃들은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분분히 날려 도로를 뒤덮고 나뒹구는가 싶더니, 내가 뒤돌아보는 사이에 어느새 봄의 절반인 四月을 하얗게 지워버렸다.


 제주대학교 진입로에 나는 서 있었다. 언제부턴가 잔인한 四月의 봄이 돌아오면 나는 벚꽃을 보러 이곳에 오곤 한다. 망연히 걷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벚꽃들의 즉흥무를 바라보았다. 그것들은 나뭇가지에 한시라도 더 달려있어야겠다는 바램도 없는지 조용히 툭 툭 떨어져 휘날렸다. 한 잎, 한 잎 마치 눈처럼 휘날렸다. 휘날리는 꽃잎과 꽃잎 사이로 바라다 보이는 하늘은 맑고 파랬다. 꽃잎들을 긁어모았다. 그리고 손바닥에 올려놓고 후후 불었다. 그것들은 아무런 의미 없는 것처럼 떨어져 뒹굴었다. 불어대는 숨결 따라 가까이에 혹은 멀리 떨어져 뒹굴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언제 이런 꽃잎들을 수북하게 쌓아놓고 살았던 것일까. 꽃잎들이 떨어질 때마다 내 마음 한 구석에도 툭 툭 꽃잎들이 떨어져 쌓여갔다. 그 떨어져 쌓인 꽃무덤 속에서 한 여인(女人)이 걸어 나왔다. 흰 치마, 저고리에 눈부실 정도로 새하얀 버선발로 흰 수건을 휘날리며 그 여인은 살풀이 가락에 맞추어 살풀이춤을 추는 것이었다. 흰 수건을 들고 이따금 수건을 오른팔, 왼팔로 옮기고 때로는 던져서 떨어뜨린 다음 몸을 굽히고 엎드려 두 손으로 공손히 들어올리기를 반복하며 서글프도록 신명나게 춤을 추는 것이었다. 그것은 섬세하고 참 곱다는 표현만으로는 무언가 부족했다. 슬픔과 한(恨)으로 뭉쳐져 있는 내면의 세계를 또 다른  환희의 세계로 점차 승화시켜 나가는 장엄하고 아름다운 춤사위였다.


 그 여인(女人)은 문득 이십대에 만났던 한 지인(知人)이 되어 다가왔다. 훤칠한 키에 찰랑대던 생머리가 눈부셨던 그녀, 눈썹을 새까맣게 그어대던 그녀, 서귀포 일호광장 뜨거운 햇볕아래 하염없이 앉아 있었던 그녀, 꽃을 좋아했던 그녀, 흰 우유와 흰 국수를 삼키지 못하던 그녀가 하늘 가득 다가왔다. 순간 세상이 빙빙 돌기 시작했다. 신명나게 돌아가고 있는 춤 따라 파란 사월의 하늘과 꽃잎들 사이에 갇혀버린 내가 어지러웠다.


 꽃잎들을 밟고 겨우 중심을 잡았다. 휘청 넘어질 뻔한 내 몸 위로 꽃눈이 내린다. 지난겨울에 미처 내리지 못했던 늦둥이 내 영혼 하나 차곡차곡 내려 쌓인다. 그녀는 아직도 시(詩)를 좋아할까.  소식 없는 이 세상 어디에선가 꼭꼭 엎드려 나처럼 시(詩)를 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살아간다는 건 결국 저 꽃잎들을 한 차례 흔들고 흩어져 가는 바람일 것이다. 그 흩어져 가는 바람처럼 우리도 누군가를 한 차례 흔들고 또는 흔들리면서 흩어져 갈 것이다. 얼마동안을 내 영혼의 빛깔도 없이 살아온 게 아닐까 생각한다. 온 몸으로 일어서기 위해 단단히 뿌리내려야겠다.

출처 : 겨울나무
글쓴이 : 상크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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