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세 살 가을에 배우는 자전거
문상금 / 시인
▲ 삽화/ 이왈종 화백
올 구월은 여전히 뜨거웠다. 길 가에 코스모스가 살랑거리고 가끔은 가슴 저미는 그리움으로 먼 산 바라보기가 늘어나는 이 가을이 오기 한 달 전부터 나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무서웠다. 큰 행사를 치룰 때나 결정할 때는 오히려 대범해지고 스케일이 커지다가도 작은 일, 소박한 일 하나에 괜히 힘들어하고 불안해하는 내 성격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지라, 서귀포시생활체육협의회 “자전거교실”에 1번으로 등록해놓고는 한 달 내내 걱정이 되어 죽을 지경이었다.
마흔 세 살 가을이 오도록 나는 자전거를 한 번도 타 본 적이 없다. 가끔 타보고 싶다는 생각은 했었지만 실행에 옮길 정도는 아니었다. 바깥채에 보관중인 세 대의 자전거는 가끔씩 남편 혼자서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볼 때 사용될 뿐이었다.
살다보면 원하든 원치 안하든 해야만 하는 일이 생겨나는 법이다. 이번 일도 어떤 단체를 이끌면서 순전히 책임감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다.
삼십명의 어머니들은 첫 날은 자전거 이론교육을 받고 이튿날부터는 월드컵경기장에서 노란색 “자전거교실”깃발이 달린 분홍색 자전거를 한 대씩 수령받고 기본연습에 들어갔다. 나란히 줄지어 선 채로 페달을 규칙적으로 돌리는 법, 균형잡는 법, 브레이크 잡는 법 등을 차례차례로 배우면서 나는 먼저 새 친구에게 조그맣게 속삭였다. “우리 잘해 보자고, 사실은 네가 무척 두렵다고”
처음엔 서툴던 사람들도 이삼일 기본을 배우면서 자연스레 페달을 밟으며 월드컵경기장 광장을 질주하기 시작하는데 나는 영 진도가 없었다. 페달 밟는 법도 여전히 서툴렀고 균형잡기도 어려웠다. 사실 내가 서툴러하는 게 어디 한 두 개일까. 어렸을 때부터 세상살이에서 나는 처음 접하는 모든 것을 어려워했다. 그 깊은 내면에는 어떤 낯선 것에 대한 뿌연 안개 속같은 두려움이 깔려있었던 같다.
그래서 나름대로 터득한 방식이 있다. 절대 옆 사람들과 나 자신을 비교하지 않을 것, 한 템포 늦추어 진도를 나갈 것, 우선 제일 중요한 것은 그 대상과 친숙해질 것, 절대 포기하지 않고 긍정적인 마음을 항상 가질 것 등등을 내 방식으로 정해놓고 있는 것이다. 내가 처음 자동차를 운전할 때도 물론 마찬가지였다. 나는 내 차 “상큼이”와 친해지기 위해 매일 쓰다듬으며 대화를 나누곤 했다. 그러면서 어느 순간에 주어지는 깊은 신뢰와 자신감을 갖고 벌써 팔년째 별탈없이 생활하고 있는 것이다.
금요일 마지막 자전거 수업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광장을 질주했다. 마치 분홍색 잠자리처럼 깃발을 흔들며 떼지어 광장을 날아다녔다. 가끔씩 내게로 날아와 빨리 균형잡기에서 탈출하라고, 힘차게 페달을 밟고 질주해 보라고 소리질렀지만 나는 계속 넘어졌고 온 몸이 멍투성이가 되었으며 양 팔은 쓸데없이 들어가는 힘 때문에 욱신욱신 쑤셔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끝내는 몸살로 누워버렸다.
지인(知人)들이 무료보급 받은 자전거를 트럭에 실어 우리집에 갖다주었다. 나는 몸살로 누워 이제 자전거라면 지긋지긋한데 딸애들은 예쁜 분홍색 자전거를 엄마가 받아왔다고 좋아라 골목으로 끌고 가서는 저들끼리 잡아주며 익숙하게 타버리는 것이었다. 그것을 보며 대견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허탈해지는 것이었다.
그렇게 며칠을 쉬었다. 또다시 바깥채에 넣어놓고는 생각조차 않다가 어느 비오는 날, 비옷을 챙겨입고 느닷없이 꺼내어 골목길로 나가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다.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 빗속에서 몇 번 넘어지는 나를 보며 남편은, “단단히 미쳐가는군”하는 것이었다. 동네 사람들도 빗속에서 연습한다고 우산을 씌워주며 난리였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넘어지면 또 일어나고 넘어지면 또 일어나면서 조금씩 거리를 넓혀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나는 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다. 커브도 자연스레 돌면서 말이다. 아아, 이제 나는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도“이 가을이 다 가기 전에”라는 내 목표보다 휠씬 앞당겨서 말이다.
휙휙 질주하는 차량들의 그 속도감처럼, 살아있다는 실감도 제대로 못하며 앞으로만 질주하는 세상살이에서 조금은 속도를 줄이며 살아갈 필요도 있는 것 같다. 그것도 마당가에 활짝 피어난 노란 소국(小菊)처럼 평화로운 여유를 지닌 채로 살아갈 수 있다면 참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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