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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나무 야그/신 문 기 사

[스크랩] 문상금 - 꽃에 미친 女子 - 20090516

by 오름떠돌이 2010. 5. 19.

꽃에 미친 女子

 

 

 

문상금/ 시인

 

 

 

 

 

 

▲ 삽화/ 이왈종 화백

 

 

 

 

삘기꽃이 바람에 흔들린다. 작은 솜털 같은 그것들은 조그만 바람에도 가녀린 몸짓으로 살랑이며 '안녕 안녕' 손을 흔들어댄다. 한 주먹 뽑아다 꽃병에 꽂아두었더니 사람들이 오가며 탄성을 지른다. 그것은 어린 시절, 삘기가 한창 돋아날 때 뽑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배고플때 마다 한 겹 한 겹 벗겨 그 하얀 속살을 먹어대었던 무맛 같았던 향수 때문일까.

 

나처럼 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마도 드물 것이다. 서귀포, 조용히 눈감고 부르면 눈물이 펑펑 쏟아질 것 같은 촉촉한 서귀포, 그 서정미 속에서 사십 평생을 살아오면서도 미친 듯이 꽃을 찾아 돌아다닌다.

 

쌀쌀한 추위 속에 피어나던 수선화, 길가에 나란히 돋아나 하얀 꽃대를 올리던 그 짙은 향(香), 연약한 것 같으면서도 생명력 있게 나의 마음을 다잡아주곤 하였다. 옛날 프린스 호텔 정원과 중문관광단지 가로수로 그리고 하효 지나서 길가에서 만났던 오래된 동백나무, 담벼락 따라 뚝 뚝 통째로 떨어져 핏자국보다 더 선명하게 내 뇌리에 남아있는 그 동백꽃.

 

아아, 절물휴양림 근처에서 지천으로 널려있던 노란 복수꽃도 잊을 수가 없다. 군데군데 남아있는 잔설 속에서 살며시 고개 내밀어 피어있던 그 복수꽃, 삶은 계란 노른자위처럼 목 메인 그리움으로 겨울 내내 피어 있었던 것이다.

 

지난 삼월엔 피어나는 유채꽃 따라 시간 날 때마다 길을 떠나곤 했다. 제일 먼저 피어나는 성산포 해변가, 관광객 호객을 위해 일찍 파종한 덕분에 밭 가득 유채꽃이 노랗게 손 흔들고 있었다. 사계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길에도 김영갑 갤러리 근처에도 온통 보리밭과 더불어 돌담과 더불어 유채꽃이 서럽게 넘쳐나고 있었다.

 

'잔인한 사월'이라고 불리는 사월 중순까지는 벚꽃 따라 제주 곳곳을 누비곤 했다. 퇴근하고 곧장 집으로 귀가한 적이 없었다. 맨 처음 피어난 중문 입구, 하효 길 입구, 이름모를 아파트 단지 정원수, 천지연 가는 길, 아주 오래된 고목에 거짓말처럼 여린 벚꽃이 돋아날 때 무엇이 그리 좋은지 내 마음은 어린 아기처럼 마구 설레어 미친 듯이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오래된 습관으로 사월이면 나는 제주대학교에 가있곤 하였다. 눈(雪)을 보러 그 하얀 벚꽃 눈을 보기 위하여 다섯 번이나 밤낮을 가리지 않고 뛰어 갔지만 내가 원하던 폭설은 끝내 만나지 못했다. 그 언젠가 우연히 만났던 그 분분히 나부끼던, 내 머리 위로 어깨 위로 영혼 속으로 한바탕 살풀이춤으로 내리던 그 벚꽃 눈은 올해는 만나지 못했다. 그냥 우아하게 피어있는 벚꽃 속을 걷고 걷다가 지치면 삶은 옥수수 하나 먹어대다가 5.16 도로를 넘어왔던 것이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자 거짓말처럼 벚꽃들은 떨어져 흔적도 없어지고 초록잎들로 무성해져 있는 것이었다.

 

그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허전함에 잠시 집에 틀어박혀 있었는데 어느 날 출근길에 우연히 어떤 새로운 것들이 간질간질 돋아나는 것이었다. 풀밭에 어깨를 숙이고 과연 그 무엇일까 생각하는데 그것은 바로 삘기였던 것이었다. 그래, 바로 삘기구나! 내가 인지했을 때 그 넓은 풀밭에 있었던 수많은 삘기들은 곧 내 영혼의 밭으로 날아와 나만의 삘기꽃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만의 찔레꽃이 되었던 것이다. 연못가 덤불 위에 중산간 비탈길에 하얗게 피어나 조그만 바람에도 잔잔히 흔들리는 찔레꽃을 보며 강한 생명력에 그 질기디 질긴 인간 본연의 자유인의 의지에 그 끝없는 갈망에 요즈음 나는 빠져 살고 있다. 그런 나를 보고 어떤 분이 장사익의 '찔레꽃'노래를 들어보라고 해 몇 번 반복해 들었던 것이다. 서러움과 슬픔이라고 장사익은 밤새 노래 부르고 불렀지만 나의 찔레꽃은 서러움과 슬픔을 넘어 그것은 메마른 삶에 대한 긍정적인 의지이며 재활이고 어머니 같은 한없는 부드러움과 인자로움으로 나를 포옹해 주는 것이었다.

 

그는 며칠 전 아파트 담벼락에 핀 붉은 장미 한 송이를 꺾어 나에게 주었다. '가장 예쁜 것으로 골랐어.'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떤 빛깔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런 것도 물어보지 않았다. 단지 나는 꽃을 좋아할 뿐이지 꺾거나 소유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잘 몰랐던 것 같다. 받아들고 집으로 와서 유리잔에 꽂아 두었더니, 이튿날 새벽에 그 장미꽃은 마치 해바라기처럼 활짝 피어 유리잔 속에 꽉 차 있는 것이었다. 너무 놀라웠다. 내가 해바라기를 엄청 좋아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일까.

 

발길 닫는 곳곳마다 수많은 꽃들이 피어나고 지고 그리고 내 마음 발길 닫는 곳마다 그는 만났다 헤어진다. 어떤 몸짓인지 어떤 의미인지 잘 모르겠지만 꽃을 바라보고 있으면 내 마음이 편안하고 설레듯이 그를 바라보고 있으면 내 마음도 아기처럼 편안해지고 설렌다. 무채색의 그것은 아마 또 하나의 꽃으로, 이 슬프도록 아름다운 봄, 오래도록 남을 것 같다.

출처 : 겨울나무
글쓴이 : 오름떠돌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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