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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나무 야그/신 문 기 사

[스크랩] 문상금 - 세 번째 시집이 태어날 무렵 - 20100116

by 오름떠돌이 2010. 5. 19.

세 번째 시집이 태어날 무렵 , 겨울이 오고 첫 눈이 내렸다

 

 

 

문상금 시인

 

 

 

 

 

 

▲ 삽화/ 이왈종 화백

 

 

겨울이 채 오기도 전에 첫 눈이 내렸고 1,100고지 근처를 걸어 보았다. 내가 한없이 좋아하는 겨울나무들이 거기 있었고 상고대를 보았다. 오후 햇살에 반짝이는 겨울나무들, 얼음 옷을 입고 병정처럼 거기 서 있었다. 가만히 만져보았다. 마치 오래 입은 헌 옷처럼 친구처럼 그들은 내 영혼 깊숙이 다가와 자리하였다.

 

드디어 세 번째 시집이 출간되었다. "누군가의 따뜻한 손이 있기 때문이다"란 나의 외로운 영혼에서 태어난 셋째아이를 가만히 어루만져 보았고 냄새를 맡아 보았다. 칠 년 만에 태어난 그것들을 마치 종이배를 냇물에 띄워 보내듯, 내 시(詩)들을 놓아 보냈다. 내 영혼 깊은 곳에서 꿈틀대며 솟아나오던 그것들에게 한없는 자유(自由)를 주었고 부디 행복한 뭍에 당도해 단단히 뿌리 내려주기를 간절히 기도를 하였다.

 

특별 명예퇴직을 신청하였다. 21년 오랜 시간동안 내가 머물렀던 일터에 마지막 점을 찍고 돌아서니 하염없는 눈물이 쏟아졌다. 내가 살아온 절반의 세월만큼 아름다운 추억과 열정이 있었던 중문(中文)을 쉽게 잊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한 번은 현실의 세상 속으로 발걸음을 내딛어야 한다는 생각에 미련 없이 신청서를 접수시켰다.

 

집을 비우고 길을 떠났다. 소래포구와 월곶을 가보았다. 비릿한 갯내음 풍기는 서귀포에서도 하루에 몇 번씩 바다를 보아야 편안해졌었는데 거기는 도통 바다라는 느낌이 안 들었고 서서히 불안해지는 것이었다. 한바탕 조개구이를 먹고는 그냥 돌아섰다. KTX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조금씩 편안해졌다. 쌩쌩 달리는 차창 밖으로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밤에 도착한 빛고을 광주는 온통 눈 세상(世上)이었다. 따뜻한 설렁탕을 먹고는 오래도록 광주 시내를 걸었다. 가로등 밑으로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아무도 밟아보지 않은 골목길 눈 위를 쿵쿵 힘주어 발자국을 찍어 보았다. 그렇게 밤새도록 온통 함박눈이 내렸다. 내 외로운 마음에도 내렸고 앞으로 닥칠 내 불안한 미래에도 내렸고 내가 힘주어 찍은 발자국 위에도 주저 없이 내려 상처 없고 따뜻한 또 하나의 세상을 만들어나가는 것이었다.

 

짐을 꾸리고 내렸을 때 오래 기다렸는지 마중 나온 남편은 차 안에서 잠이 들어 있었다. 곧장 천지연으로 가 바다 냄새를 맡아 보았다. 내가 태어나 여태까지 나를 성장시켜준 바다가 비로소 거기에 있었다. 내가 아파할 때나 방황할 때 한바탕 울고 싶을 때 아무 말 없이 마치 어머니의 품 속 같은 따뜻한 자궁으로 품어 주었던 오랜 친구가 거기에 있었다. 눈물이 났다. 바람 따라 조금씩 흔들리며 더 짙어져가는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그 짙은 푸름 속에서 깊고 깊은 세상의 중심을 보았다. 그 중심은 결국 내가 평생 껴안고 뿌리내려야 할, 바로 우리 집이었다.

출처 : 겨울나무
글쓴이 : 오름떠돌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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