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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나무 야그/신 문 기 사

[스크랩] 문상금 - 가을 이야기 - 20091025

by 오름떠돌이 2010. 5. 19.

가을 이야기

 

 

 

문상금 / 시인

 

 

 

 

 

▲ 삽화 - 이왈종 화백

 

 

 

 

길을 나서면 들녘에 피어나 손 흔드는 억새꽃들이 미칠 듯이 좋다. 그래서 유독 가을에 외로움을 많이 타는 나에게 그것은 작은 위안이 되곤 한다. 요새는 쉴 새 없이 길을 나서 억새꽃을 보러 다닌다. 산굼부리이거나 어느 이름 모를 들녘이거나 지천인 억새밭을 오래도록 서성거리다 돌아오곤 한다.

 

오늘은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거문오름을 다녀왔다. 두 시간에 걸친 분화구 탐방과 아홉 개의 봉우리를 타고 내려오니 꼬박 3시간이 걸렸다. 거기에는 수많은 나무들과 열매와 새들과 슬픈 이야기들이 바람소리와 함께 공존하고 있었다. 그리고 억새꽃도 있었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걷다가 떨어진 도토리 열매 여섯 개와 솔방울 네 개를 주워 가만히 만져보았다. 매끈거리고 초록이며 갈색을 띤 그것들은 너무 익숙한 느낌이었고 바라볼수록 아름다웠다.

 

교래(橋來)에 가서 또 억새꽃을 바라보다 토종닭을 먹었다.

그리고 지인(知人)이 입원한 제주대학병원에 가서 도토리 열매 세 개와 솔방울 두 개를 선물로 주니 너무나 좋아하는 것이었다. 신장이 안 좋은 그녀는 유독 창백해 보였다. 혈관을 못 찾아 내일쯤엔 혈관수술을 하고 링거를 꽂을 예정이라 말하며 그녀는 억새꽃처럼 하얗게 웃었다. 오랜만에 도서관에 가면 공부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이 있듯이 병원에 가보니 왜 그리 아픈 사람들이 많은 것일까. 사방이 유리로 둘러쳐져 가을 햇살이 따뜻한 커다란 병실엔 파란색 가운 입은 환자들이 가득 누워 있었다.

 

오랜만에 제주시내 중앙로에 내려가 보았다. 25년 전 대학시절에 매일같이 드나들었던 그곳은 마치 오래 묵은 옷처럼 친구처럼 그 당시 그 느낌 그대로 나를 편안하게 맞이해 준다. 단지 조금 더 화려해졌고 거리에는 꽃들이 많이 놓여 있고 오가는 사람들이 참 분주하다는 것이 좀 생소하게 다가왔다.

 

칠성로에서 24시 뼈감자탕을 운영하고 있는 허시인을 만나러 문을 열고 들어섰다. 소고기죽을 먹고 있다가 수저를 든 채 희죽이 웃는다. 건강이 안 좋아져 내리 제주대학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이제는 약물 치료를 받고 있다고 한다. 그 좋아하던 술과 커피도 아예 끊고 차가운 음료도 못 마시고 삼시 세 끼 죽을 먹어야 한다고 하니, 괜히 눈물이 나려 한다. 그래도 얼마 전에 시집을 펴낼 정도로 많은 시작품을 쓰고 있고 문학 활동도 활발히 하니 참 다행이지 싶다.

 

5.16도로를 넘어 집으로 돌아오는데 숲 터널 근처에 드문드문 단풍잎이 빨갛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조용히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가을날이란 시(詩)를 읊조려 보았다.

 

- 주여, 때가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길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으십시오. 들에다 많은 바람을 놓으십시오. 마지막 과실들을 익게 하시고,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 그들을 완성시켜 마지막 단맛이 짙은 포도주 속에 스미게 하십시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고독한 사람은 이후로도 오래 고독하게 살아 잠자지 않고, 읽고, 그리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바람에 불려 나뭇잎이 날릴 때, 불안스레 이리저리 가로수 길을 헤맬 것입니다.

그렇게 가을이, 완연한 가을이 나에게로 왔다.

출처 : 겨울나무
글쓴이 : 오름떠돌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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