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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나무 야그/신 문 기 사

문상금 - 나를 붙잡고 있는 것은 바로 나였다 - 20060729

by 오름떠돌이 2006. 7. 29.
 

나를 붙잡고 있는 것은 바로 나였다.

 

 

문상금/시인

2006년 07월 29일 서귀포신문 

        ▲ 삽화 / 이왈종 화백

 

 

참 오랜만의 일이다. 조금씩 어둠이 내리는 길가에 앉아 친구를 기다린다. 곧장 오겠다던 친구는 오 분, 십 분 어찌된 일인지 늦어지고 아예 서홍 다리 모퉁이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 앞을 쉴 새 없이 질주하는 차량들, 하루를 무사히 일터에서 보내고 집으로 귀가하는 차량들 아니면 또 다른 약속을 위해, 휙휙 지나쳐 달린다. 그것은 바로 매일 매일의 우리들 모습이고 나의 모습일 것이다.


복잡했던 머리를 털어내고 마음도 비우고 그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참말 신기하다. 희미한 어릴 적 기억 속에만 존재할 줄 알았던 그 기다림, 장에 가신 엄마를 하염없이 기다렸던 버스 정류소라든가 늘 가슴 설래던 사람을 기다릴 때의 그 애틋함이 오랜만에 되살아난다.


그 위로 처음에는 연보라의 어둠이 내리다 차츰 짙은 자줏빛 어둠이 길 위에 나무 위에 내 가슴 깊숙이 내린다. 매일 시작하는 새벽에도 여러 빛깔이 있지만 석양에도 여러 가지 빛깔이 있음을 본다. 그것은 좀 애잔하고 한 순간 그 모든 것을 진한 어둠으로 감싸 안아 버리는 것이었다.


그토록 기다렸던 친구가 나타나자 우리는 쏜살같이 절물 휴양림을 향했다. 바로 일 년에 한 번 있는 여고 동창 단합대회에 가는 길이었다. 1박 2일 동안 쏟아질 반가움과 수다와 그리고 모처럼 집과 가족을 벗어났다는 여유로움에 발걸음도 가볍게  한라산을 넘어가는 것이었다.


차츰 웰빙과 안식이 우리들 생활 깊숙이 뿌리내리며 많은 변화가 요구되고 있는 현실이다. 며칠 전 미국의 여성 저널리스트 작가인 셰릴 자비스가 자신을 포함한 55명의 여성들이 경험한 것들을 기록한 책 <결혼한 여자 혼자 떠나는 여행, 결혼 안식년>을 읽었다. 이 책은 홀로 집을 떠나 자신을 찾는 안식여행길에 오른 결혼한 여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어떤 여자는 걸어서 자기 나라를 횡단하는 모험에 도전했다. 또 어떤 여자는 애팔래치아 산맥을 관통하는 대장정에 올라 자신의 계획을 이루었다. 그리고 늘 읽고 싶은 책들이 많았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그럴 시간을 갖지 못하다가, 읽고 싶은 책 100권을 갖고 프랑스 시골 수도원에 6개월간 묵으며 오로지 책만을 읽다가 돌아온 여자도 있었다.


여자들은 떠났다. 아이들과 남편 그 동안 너무나 충실했던 가정을 잠시 떠나 그녀들이 경험하고자 하는 다른 문화든 모험이든 그 낯선 곳에서 자신의 우물 속에 푹 빠져 더 깊은 곳의 자신과 만나고 돌아왔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법률시험에 합격한 여자도 있고, 중편소설을 완성한 여자도 있다.


여행길에서의 경험을 성과로 전시회를 연 사람도 있었다. 당연히 혼자 보낸 혼자만의 시간이 삶의 연료가 되어 불타오른 것이다.


변화는 이것뿐이 아니었다. 서로가 서로의 공간을 인정하고 허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따로 또 같이’가 주는 자유로움을 알게 되었다. 아이들에게 엄마의 개입이 줄어든 만큼 아빠의 관심이 늘었다. 결혼은 ‘이래야 한다’는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들을 버리고 대신 결혼은 ‘이럴 수도 있다’는 새로운 생각들로 바뀌었다.


“나를 붙잡고 있던 것은 결혼이 아니었다. 내가 원하는 삶을 가로막는 장벽은 바로 내 안에 있었다. 나는 3개월을 떠났다가 돌아와도 결혼이 계속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다. 이제 그럴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자, 삶은 다시 드넓어졌고 시간과 함께 확장되면서 가능성으로 넘쳐나기 시작했다.”


바로 책의 마지막 부분이다. 절물 휴양림엔 축축 비가 내리고 있었다. 숲 사이로 나무로 만든 다리가 비를 맞고 있었다. 하나 둘 모여드는 일행들에게 손 흔들며 내 마음도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집에는 전화 한 통 하지 않았다. 어둠 속에 간혹 있는 등(燈) 따라 숲 속의 조그만 길을 오래도록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