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필봉] 장님과 안내자
시인 문상금
삽화/이왈종 화백
창문 너머 촉촉한 새벽을 이끌고 이슬비가 내린다.
마당 한편에 며칠 사이 무성해진 치자나무에 하얀 꽃이 한창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돌돌 접혀진 꽃잎들은 마치 활소라 껍질처럼 하나 둘 기지개를 켜더니, 간혹 들썩이는 바람에 그 특유의 강렬한 향(香)을 내뿜는다.
내 기억 속의 치자는 장마철에 피어나곤 했다.
초록 잎과 하얀 꽃잎에 온통 물방울을 매달고 지는가 하면 또 피어나기를 한 달 내내 반복하는 것이다.
그것을 지켜보노라면 어느 새 후텁지근한 장마는 건너가고 무더운 한여름으로 접어들곤 했다.
모처럼 휴가를 받아 서둘러 남편과 아이들을 일터와 학교로 보내고 애들 학교 어머니회 수련회에 참석했다. 9시에 출발해 오후 5시 수련회 일정이 끝났다. 이시돌 ‘젊음의 집’으로 가는 도로변에는 나리꽃과 수국이 줄지어 피어 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학교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50분 수업에 짧았던 10분 휴식, 강연도 듣고 모둠별 토론도 하고 장기자랑도 하며 즐겁고 새로운 기분이었다. 특히 인상깊었던 것은 맨 마지막 수업이었던 ‘장님과 안내자’였다.
깡마른 몸매에 활짝 웃는 모습이 시원스럽던, 빼빼로 수녀님을 따라 장님과 안내자의 역할을 번갈아 체험해보는 시간이었다.
나는 맨 처음 안내를 맡았는데 내 짝은 안대로 눈을 가리고 바깥으로 나서자 불안해했고 두려워했다.
아스팔트 도로, 계단, 자갈길 그리고 무덤 옆에 돌무더기에도 올라가 한 바퀴 돌았다. 조그만 것이라도 하나하나 설명해 주어야 했다. 그리고 역할을 바꾸어 나는 장님이 되고 내 짝은 안내자가 되었다.
안대로 눈을 가리자, 등뒤와 안내자가 있는 왼쪽은 빼고 오른쪽에 딱딱한 것 같지는 않고 뭐랄까 공기나 구름의 소용돌이 같은 회색의 벽이 다가왔다. 그것은 아마 일종의 불안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곧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천천히 발을 내딛기 시작하자 비록 눈은 보이지 않아 안내자의 설명에 의지하면서도 온 몸의 감각이 조금씩 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신발 아래로 느껴지는 흙과 돌, 그리고 풀의 감촉이 생생하게 전해졌으며 손으로 만져본 꽃들과 이름 모를 풀의 체취 그 허브 향이 오래도록 기억되었다. 잊고 살았던 조그맣고 가냘픈 새의 소리, 날개의 퍼덕임, 바람의 촉감, 습한 공기의 느낌들이 속속들이 감지되었다.
흔들거리는 의자와 징검다리도 건너보았는데 어느새 불안감은 눈 녹은 듯 사라지고 조금씩 빠르게 발을 옮기고 있었다. 땀과 이슬비에 입은 옷은 흙투성이가 되어 버렸지만 우리 집 마당의 치자 꽃 향(香)처럼 이시돌 ‘젊음의 집’은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골목길을 나서면 휙휙 질주하는 차량들, 앞으로 달리고 또 달리는 그 속도감 때문에 너무 아찔해 아예 눈을 감아 버린다. 그 감은 세상 속으로 늘 분주한 내 일상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아, 너무 달리며 살았었구나. ‘더 빨리 빨리’를 외치며 살아있다는 실감도 제대로 못하며 슬픈 하루를 살았었구나.
가끔은 삶을 살아가면서 스스로 장님이 되어볼 필요도 있을 것 같다.
세상 속에서 숱하게 쏟아지는 엄청난 사건들과 말들을 가려서 듣고 조용히 자연의 소리에 귀기울이며 겸손해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늘 바쁜 일상들이 내달리는 이 디지털 시대에 마지막 남은 순수의 아날로그가 되어 살아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제477호 (2005년 7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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