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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나무 야그/신 문 기 사

문상금 - 안개와 데미안 - 20060520

by 오름떠돌이 2006. 5. 20.

  안개와 데미안


-문상금

 

서귀포남제주신문

 

 

 우중충한 날씨가 연일 이어지고 있는 봄날이다. 햇살 눈부신 오월이라면 마음도 화사해지고 참 좋을 텐데 며칠 전처럼 돌풍이 불었던 날은 도로에 찢겨 흩어지는 나뭇잎처럼 영혼이 그 어딘가 암울한 동굴 속을 미친 듯이 헤매고 다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한다.

딸애를 도자기 교실에 내려주고 돌아오는 고근산 아래 도로는 순식간에 짙은 안개의 세상이 되어버렸다.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안개 속을 등(燈)이란 등(燈)은 다 켜고 더듬더듬 기어간다.

 

거울 속으로 들여다보이는 세상은 끝없이 이어진 안개의 터널, 낯선 미궁 속으로 한없이 빠져든다. 서둘러 벗어나려고 할수록 그것은 거대한 세계로 변해 나를 단숨에 삼켜버리는 것이었다.문득 사춘기 때 심취했던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 떠오른다. 여리고 섬세했던 시절, 질풍노도의 시기를 공감하며 그 무언가에 대한 한없는 동경으로 반복해 읽었던 것이다.

 

신앙과 지성이 조화된 따뜻한 가정에서 자라난 라틴어 학교의 학생이었던 싱클레어는  불량배 프란츠를 따라 거칠고 어두운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다. 그 때마다 데미안은 소년을 구해내고 그를 자기 발견의 길로 인도한다.

 

소년은 데미안을 만나게 되면서 어두운 무의식의 세계와 의미 있는 자기 내면에의 길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데미안은 카인과 아벨이라는 성경의 구절을 새로이 해석함으로써 싱클레어에게 선과 악을 다르게 생각하게 해주었다. 자신이 속해 있는 세계와 금지된 다른 세계, 자신 내부의 선과 악이 대립하며 싱클레어는 구도의 길을 걷게 된다. 그의 구도의 과정은 성숙하지만 절대 진리는 진리탐구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고뇌를 통한 것이란 걸 깨달은 후 데미안을 다시 만나게 된다. 여기서 데미안은 자아 또는 경지에 이른 바로 자기 자신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가이며 시인인 헤르만 헤세 역시 신학교 기숙사의 속박을 벗어나지 못하고 탈주,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는 시계공장의 공원생활과 서점의 견습 점원을 거치며 첫 시집 ‘낭만적인 노러로 릴케의 인정을 받았고 ‘수레바퀴 아래서’ ‘싯다르타’ ‘유리알 유희’등의 저서를 남겼다. 세상을 떠날 때까지 헤세는 오로지 자기실현의 길만을 걸었다.

 

“두 개의 영역”, “새는 알에서 빠져 나오려고 투쟁한다.” 가장 인상 깊었던 문구이다.안개의 터널 중간에서 딱 멈추어 섰다. 어쩐지 당장은 빠져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들어 길가에 쪼그리고 앉아 시작(詩作)노트를 꺼내어 詩를 쓰기 시작했다.

 

눈 감으면

내가 보였다

봄날

조개껍질의

텅 빈 고요


이 바닷가

늘 외로운

안개의

나라에 이르는


네 속의

내가 보였다

그리고 ‘안개의 방’ 이라 이름을 붙였다.

 

 

2006년 05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