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필봉] 잔인했던 4월
글/시인 문상금
삽화/이왈종 화백
불기 2549년 부처님 오신 날에 나는 약천사 대웅전에 있었다.
이날 오후 2부 행사, 국악 프로그램에 딸애들의 물허벅춤과 북춤 공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커다란 금불상이 안치된 대웅전. 넓고 서늘한 마룻바닥에 깔린 빨간 솜 방석의 매그러운 촉감, 쉴새 없이 드나들며 절을 하며 무언가를 간절히 기원하는 사람들이 참 새로웠다.
불교신자가 아닌 체험학습으로 자녀들과 나들이 나온 젊은 부모들과 관광객들도 많았다.
대웅전 높은 천장으로 길을 잘못 든 제비 한 쌍이 당황스레 이러 저리 나래를 쳤고, 분수처럼 쏟아지는 햇살 아래 잔디밭을 가로질러 수 백명씩 줄지어 점심 고양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나도 무언가 간절히 빌고 싶어졌다.
무릎 꿇고 조용히 감은 눈 위로 4월 어느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날은 가족들과 맛있고 행복한 저녁 식사를 하고 들렀던 주유소에서 일어났다.
어둠 저 편에 물컹한 그 무엇이 있는 것 같다고 느꼈을 땐 이미 늦어 그 물컹한(강아지) 것이 내 상큼이(자동차) 뒷바퀴에 깔려 있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주인 손에 들려 가는 그 조그만 것을 보고 이 세상에 연약한 생명 하나가 나로 인해 꺼져 가는 것을 똑똑하게 보았다.
바로 한치 앞도 내다볼 줄 모르는 우리는 얼마나 어리석은 존재인가? 바로 몇 분전, 행복한 시간으로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너무 마음이 아팠다.
내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 간에 말이나 행동 하나 하나가 사방에 쏜살같이 날아가 독화살로 꽂힐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 몸 어딘가 숨어 있던 살기(殺氣)가 운 없는 그 강아지한테로 곧장 날아간 것이다.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T.S 엘리엇의 장시 ‘황무지’의 첫 구절처럼 너무나 우울했고, 나는 시(詩) 한 편 제대로 쓸 수 없었다.
벌써 여러 번 ‘용서’를 읽는다. 그것은 티베트의 영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와 그의 중국인 친구 빅터 챈이 가슴과 가슴을 맞댄 대화이고, 용서의 대화이다.
빅터 챈의 말총머리와 따뜻하고 잘 웃고 장난 잘 치는 달라이 라마가 인상 깊었다.
‘용서하라. 그래야만 진정으로 행복해진다’는 달라이 라마의 가장 평범하면서도 진솔한 진리가 내 마음에 와 닿는다.
나도 나의 숱한 허물들을 누군가가 용서해 주기를 바란다. 부디 그 강아지도 나를 용서해 주었으면 좋겠다. 저 파란 하늘로 훌훌 날아가 더 좋은 세상, 좋은 인연으로 태어나길 간절히 기도한다.
공연을 끝낸 딸애들은 대웅전과 잔디밭을 천방지축 뛰어다니고 있었다.
미사가 끝나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성당에 익숙해 있던 나로서는
종일 인파로 북새통인 약천사의 풍경이 참 새로웠다. 그 속에 길들여지지 않은 질서와 자유가 있었고 따뜻한 인간미가 살아 숨쉬고 있었다.
점심 공양 틈에 끼어 펄펄 끓고 있는 미역국을 한 사발 다랄고 해서 밥에 말아먹었더니 온 몸에 땀이 흠뻑 났다. 마치 금방 아기를 낳은 산모가 땀을 뻘뻘 흘리며 미역국을 먹듯이.
참으로 오랜만에 편안함을 느꼈다.
제471호 (2005년 6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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