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아홉살의 늦가을
문상금 /시인
삽화/이왈종 화백
여행은 항상 우리를 설레게 한다. 또 영혼 깊숙이 뿌리내려 세상 속으로 환한 시야를 갖도록 한다.
우울했던 서른아홉 살의 늦가을, 여행 가방을 꾸리고 유럽으로 떠났다. 11시간의 비행을 끝내고
로마 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5시, 약간 흐렸고 한적했고 이제 막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고
있었다. 버스에 몸을 싣고 로마 시내를 빛나는 눈으로 바라보며 그렇게 이탈리아, 스위스,
프랑스는 나에게 다가왔다.
먼저 그 규모에 깜짝 놀랐다. 건축물이나 도로는 물론이고 소나무, 갈대 심지어 식탁에 오른 갈치
토막까지도 엄청나게 커 징그러웠다. 특이한 전찻길과 떼베르강 따라 조그만 자동차들이 질서
정연하게 주차가 참 잘 되어 있어 감탄사가 절로 나왔던 로마,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운데
성베드로 대성당과 바티칸시, 카타콤베, 콜로세움을 둘러보았다. 장엄하고 엄숙한 미사가
집전되고 있는 문 밖에선, 어린애들을 옆구리에 끼고 순례자들과 관광객들의 허술한 틈을
엿보는 집시들이 서성거려 마음이 서글펐다.
콜로세움은 야생동물과 투사들 그리고 기독교도들의 피비린내가 여전히 진동했고 카타콤베에선
저절로 눈가가 촉촉해졌다.
300년간 600만 명의 순교자, 성인 및 일반 신자들이 묻힌 그 곳, 석회와 수분이 혼합돼 단단한
통로가 생겨나자 수 십 수 백 ㎞에 달하는 어느 누구도 그 끝을 알 수 없다는 지하 미로의
세계 속에서 박해를 피해 무덤 속에 살면서도 오로지 신(神)을 믿고 순종하며 따랐던 그들,
햇빛이 없어 하얗게 죽어 가는 아이를 품에 안고 모든 걸 신(神)에게 의지했었던 그들,
그렇게 아기를 묻고 아내를 묻으며 무덤들은 하나씩 둘씩 끝없이 생겨났을 것이다.
베수비오산의 대폭발로 매장되었던 폼페이도 흥미로웠고 나폴리, 산타루치아 항구 그리고
카프리섬은 우리 서귀포의 날씨와 푸른 바다빛깔을 지니고 있어 참 좋았다.
세련되고 활기찬 밀라노에서 버스를 타고 스위스를 향할 때, 하늘은 파랗고 길가 풀섶에는
서리가 하얗게 내려있었다. ‘사운드 오브 뮤직’을 보면서 꼬모 마을을 지나 버스를 탄 채
국경을 통과하는 것도 이채로웠다.
스위스는 우리네 강원도 눈 쌓인 골짜기 마을이 연상되었다. 어떻게 그런 아슬아슬한 높이에
보금자리를 틀고 사는지 신기했다. 특히 고소하고 맛있었던 치즈의 맛.
어딜 가나, 한 편으론 가족들의 안부가 궁금했다. 두 장의 엽서를 보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바티칸 우체국과 스위스 알프스 산 만년설로 만들어진 3000m가 넘는
얼음궁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우체국에서, 영하 15도 스핑크스 테라스에서 시퍼렇고 단단한
만년설을 바라보며 그 곳에서 팔고 있는 반가운 우리나라산 컵라면과 진한 카푸치노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갑자기 숨이 차고 어지러웠다. 그 곳에선 산소가 부족하다고 절대 뛰지 말라고
했다.
매년 관광객이 8000만 명에 이르는 파리는 , 늦가을 간간이 빗방울이 떨어지는 회색의
도시였으며 예술적인 기운이 섬세하게 다가왔고 길 가에는 낙엽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그리고 길모퉁이 식당에서 맛 본 달팽이 요리는 초록색이었고 너무 맛있었다.
노트르담 대성당, 루브르 박물관, 베르사이유 궁전도 놀랍지만, 그 중에서 일렁이던 등불들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소녀 시절, 우리는 얼마나 외우고 또 외웠던가.
아폴리네르의 ‘미라보 다리’를, 바로 그 곳에서 내가 있었던 것이다. 여전히 생머리 흩날리며,
저절로 순수하고 섬세한 시(詩)가 씌어질 것 같았다.
열흘은 금방 흘러갔다. 세 나라의 대표적인 곳만을 살펴보며 금방금방 짐을 꾸려야 했기 때문에
항상 아쉬움이 남았다. 특히 유럽인들과 소박한 마음으로 친밀하게 접근할 기회가 없어서 우리는
그네들의 도시와 건축물과 거리만 훑어보고 돌아온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특히 인상이 깊었던 것은, 산위의 도시국가 오르떼와 마을 언덕이나 산 정상에 세워져
있는 십자가였다.
서귀포에선 어디를 가나 분수처럼 수평선이 따라다녔는데, 이곳에선 온통 십자가였다. 바로 그런
신앙의 힘이 이 엄청난 예술을 꽃 피었을 것이다. 평생 등이 굽도록 성서 이야기를 천장화로 그려
내었으며 500년이나 걸쳐 대성당을 하나씩 완성해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바깥으로 내다보이는 농촌풍경들은 우리네처럼 평화로웠다. 맑은 날씨이거나 아니면
비가 내렸고 푸르른 잔디, 풀을 뜯는 말과 소들 그리고 양떼들, 커다란 지붕을 가진 농가들,
맨 처음 만났던 올리브 나무와 거대한 갈대숲, 스위스의 꼬불꼬불 산자락에서 만난 파랗고
투명한 시냇물과 흰 자작나무, 그것들은 내 상상의 친구처럼 반갑게 다가왔고 늘 대하고 있었던
것처럼 낯익었다.
시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아스팔트가 아닌 과거에는 마차용 도로로 사용되었던 돌바닥 길,
어느 도시를 가든 방문할 수 있는 박물관과 미술관에서 자신들의 문화와 전통을 최대한
보존하려는 강한 전통적 문화의식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러나 한없이 오만했던 그들.
밤 9시에 도착한 서귀포는 비릿한 갯내음 풍기며 달려들었다.
오래 기다렸는지, 가로등 아래 서성대고 있는 남편의 뒷모습에서 늦가을 유자차를 담글 때,
그 향 너머로 다가오던 유자의 끈적거림을 보았다. 깊고 깊은 세상의 중심을 보았다.
그 중심은 결국 내가 평생을 껴안고 뿌리내려야 할, 바로 우리 집이었다.
늘 겨울나무를 꿈꾸었던 때가 있었다. 바람불고 눈보라 속에 맨몸으로 그러나 눈부시고 당당하게
서 있던 한라산 중턱의 겨울나무들, 그 길들여진 외로움과 기다림,
그러나 그 겨울나무 속에는 봄 나무와 여름나무 그리고 가을나무가 들어있음을 나는 알았다.
어쩌면 겨울나무처럼 나도 자신을 이겨내며 여러 가지 모습으로 새로워지며 단단히 뿌리내리고
싶다는 그런 꿈을 꾸었던 것은 아닐까.
아홉수에 매여 질척이던 봄, 여름, 가을을 훌훌 털어버리고 그렇게 나는 겨울이 되고 있었다.
마흔살이 되어가고 있었다.
서귀포신문 제463호(2005년 4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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