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상금. 시중유화 화중유시(詩中有畵 畵中有詩), 문필봉, 서귀포신문, 2012년 11월 17일
시중유화 화중유시(詩中有畵 畵中有詩)
<문필봉>시인·수필가 문 상 금
2012년 11월 17일 (토) 11:25:08 서귀포신문 webmaster@seogwipo.co.kr
삽화 정지란.
이토록 눈부신 가을이 왔다. 파란 하늘 아래 가녀린 코스모스 길을 오래도록 걸었다. 문득 어지럼증이 일었다. 짙은 외로움은 그림자처럼 늘 따라다니지만 그래도 이만하기 얼마나 다행인가, 건강이 많이 나빠졌고 한 달에 서너 차례 병원에 갈 때마다 나날이 처방약이 늘어나지만, 그래도 이만하기 얼마나 다행인가. 겨뤄보기로 했다. 절망의 끝까지 내려가 보기로 했다. 절망이 이기나 내가 이기나.
얼마 전에 지인(知人)의 농장 파티에 다녀왔다. 귤도 따고 사진도 찍고 시낭송도 하였다. 그렇게 진하고 예쁜 귤빛을 본 적이 없다. 숱하게 보았음에도 시시각각으로 하늘빛과 바다빛이 달라지는 것처럼 귤빛도 달라지는가 보다. 한라산 아래 펼쳐진 농장 전체가 한 폭의 그림처럼 다가왔다.
문득 ‘시중유화 화중유시(詩中有畵 畵中有詩)’ 란 말이 떠올랐다.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 는 송나라의 소동파가 당나라의 대시인 왕유의 시를 평하면서 유명해진 말이다. 그리고 내가 어릴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그리고 목숨처럼 시를 써가는 마흔의 중반에 여러 대가들로부터 받은 격려의 글귀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대학을 마치고 습작을 하며 시 공부를 하던 3년여 동안 단지 시만 쓴 게 아니라 그림 전시회와 음악 공연 그리고 춤을 보러 다녔다. 시는 문학 중에 으뜸이며 또한 시 속에는 그림과 음악 그리고 춤을 비롯한 모든 종합예술들이 총 망라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좋은 시작품을 쓰려면 음악을 들을 줄 아는 귀를 열어두어야 하고 그림 속에 철학을 읽을 줄 알아야 하며 춤 속에 리듬을 느낄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운명처럼 평생을 작업하고 있는 시(詩) 다음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은 바로 그림이다. 이십대부터 한 개 두 개 모으기 시작한 그림들은 동양화, 서양화를 합하면 어느 새 80여점은 족히 넘을 것 같다. 새벽녘에 시를 완성하고 난 후의 희열감은 물론이거니와 좋은 그림들을 하나씩 꺼내고 바라볼 때의 기분은 너무나 편안하고 흐뭇하다. 마치 축축한 어머니의 자궁과도 같은 그림 사이에서 태아처럼 사지를 동그랗게 오그리고 밤새 잠이 들 때도 있었다. 때로 사람들은 나를 쓰러뜨렸지만 시나 그림은 단 한 번도 나를 분노와 배신으로 쓰러뜨리지 않았다.
분노와 배신의 칼날에 베여 숱하게 피투성이가 되는 밤이면 겨우 두 세 시간 간헐적으로 잠을 자곤 하였다. 그래도 잠이 들지 못하면 이중섭이 아들들과 해초를 뜯고 게를 잡았다는 자구리 해안 짙은 밤바다에서 시를 썼다. 그리고 동 틀 무렵이면 시내 골목들을 돌고 돌아 겨우 집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그래도 이만하기 얼마나 다행인가, 최악의 가을을 아주 잘 견디고 있다. 그리고 어느 새 네 번째 시집 준비를 하고 있다. 또 몇 년 후에는 컬렉션 전시를 꿈꾼다. 그것은 회색 노트에 빼곡하게 적혀있는 수많은 꿈들 중 하나이다. 창 밖에 앉은 바람 한 점에도 사랑은 가득하고 푸르고 높은 하늘이 정말로 눈이 부신 가을에, 그것은 바로 내가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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