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상금 - 이별(離別),
진한 먹빛 같은 삶을 살 수 있다면 - 문필봉 - 서귀포신문 - 2012년 7월 14일
이별(離別), 진한 먹빛 같은 삶을 살 수 있다면
<문필봉> 문상금 / 시인
2012년 07월 14일 (토) 11:09:19 문상금 sgp1996@chol.com
▲ 삽화 / 김품창 화백.
고단한 생(生)의 길목에서 문득 어느 한순간 이제 나이가 마흔에서도 중간을 넘어 가는구나 중얼거렸던 그 때가 겨울이었는데, 어느새 봄은 소녀같이 후다닥 달아나고 벌써 여름이 되었다. 그것도 나뭇가지마다 물방울이 대롱대롱 매달리고 안개 자욱한 장마의 한가운데에서 어김없이 치자꽃은 피어난다. 그 하얀 꽃을 잡고 마구 흔들었더니 손에 향(香)이 오래도록 배었다.
서넛이 변영탁 선생님 조문을 다녀왔다. 삼농선생은 ‘극락왕생’이라는 글을 올렸다. 창밖엔 장대비가 쏟아졌고 우리는 하늘과 바다가 온몸으로 쥐어짜며 울어대는 검은 여 휴게소에 가서 오후 내내 파전에 막걸리를 마셨다. 내 마음의 바다는 마치 먹물을 풀어놓은 것처럼 칭칭 흘러넘쳤다. 오래 묵을수록 더욱 선명해지며 또렷해지는 먹빛, 그 진한 먹빛을 따라가 본 일이 있다.
초록 대문을 열고 들어서니 텃밭에 머윗대가 가득 자라나고, 감나무 너머 수돗가에 놓인 세숫대야는 그 새까맣다 못해 숯처럼 시커먼 먹빛으로 동그랗게 놓여 있었다. ‘붓을 정성스레 빨았다’고 표현하시며 씩 웃으셨다. 그리곤 일필휘지로 심청사달(心淸事達)을 써주셨다. ‘마음이 깨끗하고 맑으면 모든 일을 이룰 수 있다’ 마치 어린아이 같은 순진무구(純眞無垢)랄까, 물길 따라 물이 흘러가듯이 그대로 일평생 글씨를 쓰셨다는 변영탁 선생님 너머로 짙은 묵향(墨香)이 풍겨 나왔다. ‘내가 먹을 갈고’ ‘먹이 나를 갈고’ 그렇게 또렷하게 선명해지며 한 세월을 살다가 이렇게 가는 것이 생(生)일 것이다.
안개 자욱한 516도로를 뚫고 문인 몇이서 정군칠 시인 문병을 다녀왔다. 췌장암으로 지치고 지쳐 시커먼 얼굴에 가끔 눈만 깜박거렸다. 그 위에 내리는 고요 그리고 물집이 내렸다. “부푸는 바다처럼 내 안의 물집도 부풀고” “버릴 것 다 버린 바다의 걸러내야 할 것들이 내게도 참 많았네 어쩌면 자서적인 시(詩)일지도 모를 ‘바다의 물집’이 둥둥 그 위로 내렸다.
<숨비소리> 서귀포 시사랑회 모임을 만들었다.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소박한 모임이다. 물론 시(詩)를 쓰지 않아도 된다. 시를 사랑하는 마음만 넘쳐나면 된다. 차를 마시며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좋아하는 시 한 편씩을 들고 와서 낭송도 하고 얘기도 하고 읽고 난 문학서적들을 서로 나눠주기도 한다.
살아있는 매순간마다 탄생과 죽음, 만남과 이별 그리고 시작과 끝이 공존한다. 그 하나의 탄생과 죽음의 틈새, 만남과 이별의 틈새, 시작과 끝의 틈새를 꼬닥꼬닥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허무하게 변하는 일상(日常)에서 세월이 흘러도 빛바래지 않는 진한 먹빛 같은 삶을 살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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