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화려한 기종 변경 이야기
[한겨레21 2006-12-05 08:03]
[한겨레] 디지털 카메라의 시대를 연 소니 V1에서 첫 DSLR로 선택한 캐논 D30…‘기변’의 말기증세인 ‘라이카병’까지 나를 거쳐간 수많은 카메라들이여
▣ 박태수 생활사진가 tusita325@naver.com
2002년. 필카 펜탁스 MX와 캐논 EOS5를 그대로 둔 채, 나의 디지털 카메라 시대가 열렸다. 첫 디카는 소니 V1. 소니는 하이엔드급 500만 화소 카메라 717과 V1을 연이어 발매했다. 동료가 717을 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는 고집스럽게 V1로 갔다. M, P, S, A 등 모든 노출제어 방식을 갖춘 멋진 카메라였다. 그러나 어느 겨울 눈꽃을 찍다 세 컷 만에 배터리가 나가면서 크게 실망했다. 717은 멀쩡했다.
처음 써보는 RF, 콘탁스에 빠지다
나의 두 번째 디카는 미놀타 A1. 500만 화소급에 손떨림 보정 기능으로 무장한 당대 최고의 하이엔드급 카메라. 물론 배터리 성능도 소니 V1보다는 훨씬 좋았다. 그럼에도, 인연은 짧았다. ISO 200에서도 보이는 노이즈가 나를 슬프게 만들었다.
DSLR로 가자. 그래서 들여놓은 나의 첫 DSLR는 캐논 D30. 캐논 최초의 DSLR인 D30은 가장 좋은 재료로 만들어진 카메라였다. 300만 화소급이지만 주저 없이 D30으로 갔다. 그러나 렌즈 교환형 카메라엔 렌즈가 필요했다. 광각, 숏줌, 망원…. 그리고 대체 L렌즈는 또 뭔가? 심한 ‘뽐뿌’에 시달렸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플래그십 보디였다. 아예 최고로 가자.
성능이나 색감에서 당대 최고의 명성을 떨치던 EOS 1D. 외형에서 풍기는 그 당당함, 셔터속도(1/16000초), 실제로 쓸 일은 없지만 남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연사 실력(초당 8.5매). 인연이 다할 때까지 같이 갈 것 같았던 1D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렌즈 교환식 RF(Range Finder) 카메라인 콘탁스 G2에 안방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1D와 별거(?)가 시작됐다.
카를 차이스 렌즈의 색감과 G2의 단아한 샴페인 골드색 보디에 취해 처음 써보는 RF가 조금 어색하기는 해도 콘탁스에 제대로 빠지게 되었다. 급기야, 콘탁스의 SLR 기종인 167MT마저 들여놓게 된다. 카를 차이스 렌즈는 수동임에도 비쌌다. 167MT의 렌즈군을 구성하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G2를 방출하고 35mm 디스타곤, 50mm 플라나르, 카를 차이스 85mm 플라나르 F1.4를 영입한다.
RF 카메라에 미련이 남아 남은 돈으로 클래식 카메라의 일종인 롤라이 35(German spec)도 사들였다. 롤라이 35는 G2와 같은 카를 차이스 렌즈를 사용하지만 카메라 조작은 완전 수동이다. 목측식 거리계 그리고 수동 조리개. 천천히 살아가는 법을 알려준 소중한 녀석이었다. 풍경사진에서는 최고의 색감을 자랑한다.
조금 친해지자 롤라이 35란 녀석은 나에게 중형 TLR(Twin Lense Reflex) 카메라인 롤라이플렉스와 인사를 시켜주었다. 6x6 크기의 뷰파인더로 본 세상은 놀라운 신천지였다. 어느 날, 드디어 기변의 말기 증세가 다가왔다. ‘라이카병’.
기종 바꾼다고 실력 좋아질까
오랜 별거 중이던 1D와 렌즈를 챙겨 남대문 상가로 나갔다. 여러 번의 망설임 끝에 처분하고 새로운 애인인 M6을 맞았다. 50mm 서미크론 F2 렌즈와 함께. 역시 라이카! 빈틈이 없을 것 같은 단단한 보디. 그리고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을 것 같은 간결한 셔터. 현존하는 클래식 카메라의 최강자. 그 명성에 걸맞은 사진을 만들진 못했지만 곧 손에 익숙해지리라.
짧다면 짧았던 5년여 동안 나의 손을 거쳐간 수많은 카메라들. 그 외 미처 이름도 올리지 못한 몇몇 카메라들과 함께한 10여 년은 정말 행복과 호기심 충족의 연속이었고 한편으론 비용 지출의 연속이었다.
수많은 기변 끝에 라이카까지 온 것은 좋은 사진을 위한다는 한 가지 이유다. 물론, 많은 기종을 다뤄가며 색감과 화각에 대한 다양한 경험을 쌓은 것은 긍정적이다. 그러나 기변과 사진 실력 향상은 비례하진 않는다. 카메라를 바꿔 기분이 새로워지면 즐거운 마음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어 결과물에 약간의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끊임없는 노력만이 좋은 사진의 비결이다.
하루에 한 번도 셔터를 누르지 못하는 날이 있을지라도, 난 오늘도 가방에 카메라 하나 넣고 나간다. 언젠가 나에게 닥칠 그 찰나의 순간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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