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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멍아방 밭담길, 성산읍 신풍리

by 오름떠돌이 2025. 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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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멍아방 밭담길

 

요즘 제주는 좀 흐렸다 싶으면 열대성 스콜(?)처럼 기습적인 소나기가 자주 내리고 내려도 폭탄처럼 쏟아 붓기 때문에 흐린 날은 야외로의 계획을 싶게 내리지 못합니다. 오늘도 아침부터 내리는 비에 집콕 하려는데 동쪽하늘을 보니 파랗게 개이고 있어서 서둘러 집을 나섰습니다. 오늘 목적지는 성산읍 신풍리에 위치한 “어멍아방 밭담길” 대략 3.2km코스인데 요즘처럼 기습호우가 내리는 철에 딱 맞는 것 같아 정했습니다.

 

출처 :  구글 제미나이 검색

성산읍 신풍리(新豊里)의 마을 이름은 “새롭고 풍요로운 마을”이라는 현대적인 지향을 담고 있지만, 원래의 이름은 마을을 지나는 하천에서 유래했습니다. 신풍리의 가장 오래된 이름은 제주어인 '내끼' 또는 '내깍'이며, 한자로는 천미촌(川尾村) 또는 천미리(川尾里)로 표기되었습니다.

 

'내끼' '내깍': '내(川)'의 '끄트머리'라는 뜻입니다. 신풍리는 제주에서 가장 긴 하천인 천미천(川尾川)이 흐르는 주변에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이 하천의 끝자락 근처에 위치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현재의 이름 신풍리(新豊里)라는 이름은 행정구역 개편 과정에서 새롭게 부여되었습니다. 新(신:새로울 신) 豊(풍:풍요로울 풍) 里(리:마을 리), 이 이름은 '새롭고 풍요로운 마을을 지향한다'는 긍정적인 뜻을 담고 있으며, 주로 근대 행정구역 개편 시기에 기존 지명을 대체하는 과정에서 명명된 것으로 보입니다.

 

신풍리는 이처럼 하천에서 유래한 옛 이름과 '효도' 정신을 상징하는 “어멍아방 잔치마을”이라는 별칭을 함께 지니며, 역사가 깊고 전통이 살아있는 중산간 마을의 특성을 보여줍니다.

 

봉설노친회혼연(奉設老親回婚筵)

성산읍 신풍리 '배움의 옛터' 부근에 있다는 "奉設老親回婚筵" 이 비석은 신풍리 마을의 아름다운 효(孝) 문화와 관련된 중요한 기록물로 해석됩니다. 奉設(봉설:받들어 설치하다, 베풀어 차리다) 老親(노친:나이 드신 부모님) 回婚(회혼:결혼 60주년) 筵(연:잔치, 멍석(잔치를 벌이는 자리))

 

던데못과 도운대(道韻臺) :

제주 성산읍 신풍리(新豊里) 도운대(道韻臺)의 유래는 조선 후기 유학자이자 의병장인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선생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1875년(고종 12년) 4월, 흑산도로 유배되었던 최익현 선생이 귀양에서 풀려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신풍리 마을에 들렀습니다. 선생은 이곳에서 마을 선비들을 만나 나라를 자기 집처럼 사랑해야 하는 도리를 역설하며 의로운 가르침을 전파했습니다. 당시 선생의 낭랑하고 의로운 목소리로 전파된 가르침의 메아리(道韻)가 길이 전해져, 마을에 도타운 인심과 의로운 기풍이 더욱 진작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자연스럽게 이 지역을 도운대(道韻臺)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道(도:의로운 도리, 가르침) 韻(운: 운치, 메아리) 臺(대:언덕, 대)

 

현대(2015년)에 그 유래를 기리기 위해 이곳에 도운대 표석과 함께 최익현 선생이 지은 시 '신풍리를 지나며(過新豊村)'의 시비가 세워졌습니다.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 선생의 시 '신풍리를 지나며(過新豊村)'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 시는 1875년(고종 12년) 4월, 유배가 풀린 최익현 선생이 제주 성산읍 신풍리를 지나다가 지은 것으로, 그가 귀양살이의 회포를 담아낸 시입니다. 신풍리에는 이 시가 새겨진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습니다.

 

過新豊村 신풍리를 지나며

 

暇日登臨月滿邱 가일등림월만구

歸心超遞半天浮 귀심초체반천부

人皆雨順風調喜 인개우순풍조희

客或鳥啼花落愁 객혹조제화락수

五嶺敖逰惟弊屣 오령오유유폐사

三江跋涉是孤舟 삼강발섭시고주

聖恩罔極南來後 성은망극남래후

許我明年勝地留 허아명년승지류

틈난 날 달 비친 언덕 위를 오르니

돌아가고픈 마음 하늘까지 솟구쳐

사람들은 모두 우순풍조(雨順風調) 기뻐하지만

나그네는 우는 새 지는 꽃이 서럽구나.

헤어진 신발로 오령(五嶺)을 넘었고

외로운 배 타고 삼강(三江)을 건넜네.

남쪽으로 온 뒤 성은(聖恩)은 끝이 없어

경치 좋은 곳에서 해를 넘기네.

 

본향당 건물

 

출처 : 구글 제미나이 검색

창침정 (窓枕亭)

창침정은 '창문이 베개가 되는 정자'라는 뜻으로, 현대에 한옥 형태로 건립된 정자입니다. 신풍리 마을을 지나는 제주에서 가장 긴 하천인 천미천 냇가의 작은 동산 위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정자가 세워진 곳은 옛날부터 신풍리 마을을 중심으로 인근 삼달, 난산, 가시, 토산리 등의 문인(유림)들이 모여 시회(詩會, 화천시사 花川詩社)를 열었던 역사적인 장소입니다. 시회는 광무 연간(1897년~1907년)에 시작되어 해방 이후까지 유지되었다고 추정됩니다.

 

창침정이라는 이름은 조선시대 유학자 의청(毅淸) 오진조(吳眞祚) 선생의 시 구절 '窓前流水沈邊書(창전류수침변서:창앞에 흐르는 물 베개가에는 책)'에서 '窓(창)'과 '枕(침,베개)' 글자를 따서 지어졌습니다. '창문을 베고 물소리를 들으며 보이지 않은 정신세계를 더듬는다'는 뜻을 담고 있으며, 물질만능주의 시대에 정신적 가치를 되새기고 문풍(文風)을 일으키고자 하는 염원이 담겨 있습니다. 창침정 옆에는 의청 오진조 선생의 묵적비(墨蹟碑)가 세워져 있습니다.

 

 

관창대(觀創臺)

관창대(觀創臺)는 창침정 아래쪽에 있는 바위(혹은 작은 동산)에 새겨진 명칭입니다. '물이 불어난 모습을 보는 대(臺)라는 뜻입니다. 觀(관:보다) 漲(창:물이 불어나다) 臺(대:전망대,언덕). 예로부터 이 동산에서 태풍 등으로 천미천의 물이 크게 불어나 도도하게 흐르는 장관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관창대는 정자가 세워지기 전, 신풍리·삼달리·난산리 등의 유림들이 큰 팽나무(폭낭) 그늘 아래 모여 시회(詩會)를 열었던 중심 장소였습니다. 관창대라는 글씨는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 희미해지자, 창침정 건립 시기에 글자 그대로 다시 새긴 마애명(바위에 새긴 글씨)입니다. 누구의 글씨인지는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창침정과 관창대는 신풍리 마을의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선비들의 학문, 예술적 교류가 이루어졌던 역사가 결합된 소중한 향토 문화유산입니다.

 

 

蹟墨先生淸毅(적묵선생청의)

성산읍 신풍리 '창침정' 옆에 있는 "蹟墨先生淸毅(적묵선생청의)" 비석은 창침정의 건립 배경이 된 인물인 의청(毅淸) 오진조(吳眞祚) 선생과 관련된 비석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이 비석 자체에 대한 공식 기록은 찾기 어려우나, 창침정의 유래와 비석의 한자를 조합하면 그 의미를 명확히 유추할 수 있습니다. 蹟墨(적묵:글씨와 학문의 자취(蹟)와 먹(墨) 즉, 문장과 학문에 뛰어난 업적) 先生(선생:학덕을 갖춘 사람에 대한 경칭) 毅淸(의청:굳세고(毅) 맑다(淸)는 뜻의 호(號))

 

이 비석은 창침정(窓枕亭)의 건립 배경과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창침정은 과거 신풍리 일대 유림들이 모여 시회(詩會)를 열었던 장소에 세워졌습니다. 이 정자의 이름은 의청(毅淸) 오진조(吳眞祚) 선생의 시 구절에서 따왔습니다. 오진조 선생: 의청 오진조 선생(조선시대 신풍리 출신 유학자)은 바로 이 '毅淸'이라는 호를 사용한 인물입니다. 창침정 건립 당시 오진조 선생의 묵적비(墨蹟碑)가 함께 세워졌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따라서 "蹟墨先生毅淸" 비석은 의청 오진조 선생의 뛰어난 문장과 학문의 자취를 기리기 위해 세운 기념비를 나타내는 다른 명칭이거나, 시의 제목을 대신한 일종의 표석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비석은 신풍리 창침정이 단순한 쉼터가 아닌 지역 유학자들의 정신과 학문적 교류의 구심점이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