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상금 - 가을의 기도 - 2010년 11월 27일 - 문필봉 - 서귀포신문
가을의 기도
[문필봉] 문상금 / 시인
2010년 11월 27일 (토) 11:40:18 서귀포신문
▲ 삽화/ 이왈종 화백.
가을이 가고 있다. 골목에 서서 내가 미칠 것처럼 좋아하는 가을이 서서히 물들어가는 은행잎처럼 흘러가고 있음을 보았다. 이제 어느 바람 심하던 날 노란 낙엽으로 도로를 온통 물들일 것이다 그리고 긴 휴면(休眠)으로 들어갈 것이다.
조용히 시(詩) 한 편을 읊조려본다.
가을의 기도
<김현승>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肥沃)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百合)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오랜만에 시간을 내어 로타리 행사로 용눈이 오름을 올랐다. 생전 처음 보는 것처럼 길가에 노랗게 핀 민들레와 칡덩굴들을 찬찬히 바라보며 걷다 보니 어느 새 정상이었다. 그 곳엔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귓바퀴를 쌩하고 때릴 정도의 추위는 아니었지만 자꾸만 옷깃을 여미게 하였다. 분화구 안에 있는 풀꽃들은 잔잔히 흔들리고 있었다. 그것들을 하나씩 어루만지며 오름 밖 세상(世上)과는 그 무언가 다른 따뜻함과 평화(平和)를 느꼈다. 내 마음 한 쪽 잠시나마 얼어붙어 있었던 마음도 슬며시 풀어지는 것이었다.
솔직히 요즈음은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잘 모르겠다. 단지 하루하루를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다. 팔순의 어머니는 최종 임파선 암으로 확진을 받고 지난봄부터 투병을 하고 있다. 여름에 잠시 퇴원해 집에 갔다 왔지만 다시 입원해 병원생활이 길어지고 있다. 하얀 병실에 달력은 있지만 그것은 이미 환자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다. 며칠 전에 어머니는 창밖으로 잠시 왔다 가는 가을 햇볕을 하염없이 바라보시며 "벌써 겨울이구나." 하셨다. 눈 밑으로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적막감이 흘렀다. 내가 한라산에 며칠 전에 첫 눈 내린 얘기며 담벼락 너머 황금빛으로 익어가는 귤 이야기, 곱게 물든 단풍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잠시 창백한 빰 위로 미소가 번지는 것이었다.
이 세상에 아픈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 모두가 행복하고 즐겁게 살아갈 수 있다면 또 얼마나 좋을까. 이 가을에 두 손 모아 기도를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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