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상금 - 산수국이 필 무렵 - 20100724
산수국(山水菊)이 필 무렵
<문필봉> 시인 문 상 금
2010년 07월 24일 (토) 서귀포신문
마당 한 편에 오래 묵은 치자꽃이 피었다 지고 피었다 지고, 그에 따라 장맛비가 내렸다 그쳤다 내렸다 그쳤다 아직도 장마는 한창인 모양이다.
‘가슴 아프다’란 표현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태껏 잘 몰랐던 것 같다. 언제부턴가 계란 노른자를 먹을 때처럼 목이 메이고 가슴이 답답해지며 오싹한 느낌에 몸이 떨리곤 했는데 이런 게 바로 그런 것일까.
얼마 전에 팔순잔치를 하고 건강하시던 친정어머니가 봄이 다 갈 무렵 내가 들렸을 때 윗옷을 벗으시며 겨드랑이 밑을 한 번 만져보라고 하셨다. 무심코 손을 뻗었는데 계란 같은 덩어리가 만져졌고 온 몸이 오싹해졌다. 그건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실 때에나 그리고 시아버지가 돌아가실 때에도 골목길을 부축하여 나갈 때에도 나는 그런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이튿날 어머니를 모시고 검사에 들어갔는데 이미 여러 군데 종양들은 번져 있었다. 필름사진을 통해 곳곳에 둥지 튼 종양들은 더 이상의 치료는 힘들고 고통이 덜하기만을 도와줄 수 있다고 의사는 담담히 말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내 손을 꼭 잡은 어머니랑 한라산을 넘어오는데 길가 나무 밑에 산수국(山水菊)들이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푸르스름한 그것은 도체비꽃이라고도 불렸었다. 차창 밖을 가리키며 “산수국이 참 많이 피었네. 어머니는 꽃 중에 무슨 꽃이 젤 좋아?”“꽃은 다 예쁘고 좋지, 그래도 난 장미꽃이 제일 예쁘더라. 튤립도 예쁘고” 괜히 눈시울이 붉어졌다. 내가 봄 내내 보러 다녔던 장미꽃을 어머니도 그렇게 좋아하셨다니! 그 날 오후에 어머니를 모시고 몇 군데 장미꽃을 보러 다녔다. 아파트 담벼락이나 오래된 돌담 위 그리고 슬레트 지붕 처마 끝에 피어있는 장미들을.
며칠 후 새벽, 고열과 고통으로 응급실로 간 어머니는 내내 병원신세를 지고 계신다. 팔십 평생을 입원해 본 적이 없어 감옥 같다 하시면서도 이제 많이 익숙해지셨다. 그래도 암인 줄은 상상도 못하고 계신다. 어머니를 병간호하다 짬 내어 한라산 중턱에 산수국을 보러 갔다. 손톱만한 수국 꽃잎들을 한 잎씩 만져보았다. 화려한 것 같으면서도 은은하고 잔잔한 오히려 어머니에게는 장미보다 산수국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삽화/ 이왈종 화백.
언제부턴가 한두 점 모으기 시작한 그림들이 50여 점이 넘고 있다. 요새는 합죽선(合竹扇)에 그려진 글씨나 그림을 모으고 있다. 며칠 전에 어느 분한테 합죽선(合竹扇)에 바다를 그려달라고 부탁했었는데, 이제 산수국을 그려 달라고 부탁해야겠다. 그리고 산수국이 그려진 부채로 어머니에게 시원하게 부쳐드리며 얘기해야겠다. 어머니의 병(病)에 대하여, 아픔에 대하여, 마저 하고 싶은 일에 대하여, 흰 가운 입은 의사처럼 담담히 얘기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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