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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라산신(하로산도) - 한국의 신화 중에서 -

by 오름떠돌이 2009. 3. 20.

한라산신(하로산도)

 

설문대할망의 아들들인 한라산신(漢拏山神)들은 제주도(濟州道)전역에 흩어져 마을의 수호신이 되었다. 한라산신은 모두 9형제였는데 큰 아들 울뤠마루하로산도는 성산(城山)읍 수산(水山)리를 차지했으며 둘째 보름[바람]웃도는 서귀포(西歸浦)를 차지했다. 서귀포시 호근동의 「서천밭하로산도는 세째였으며 중문(中文)동의 도람쥐궤당의 신은 네째, 색달(穡達)동의 하로산도는 다섯째, 예래(猊來)동의 하로산도는 여섯째, 안덕(安德)면 창천(倉川)리의 당신은 일곱번째, 감산(柑山)리의 당신은 여덟째, 성산(城山)읍 난산(蘭山)리의 산신은 막내라고 한다. 또 애월(涯月)읍 수산(水山)리와 대정(大靜)읍 일과(日果)리의 「제석천왕하로산도」가 같은 형제들이라고도 한다. 또 설문대할망의 아들은 오백장군이 됐다고도 하는데 「아홉명」이라거나 오백명이라거나 하는 것이 다 숫자가 많음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인 울뤠마루하로산도는 옛 정의현(旌義縣)지역인 수산(水山)1·2리·성산(城山)·고성(古城)·오조(吾照)리등 5개마을을 다스렸다. 둘째 보름웃도는 중국(中國)까지 가서 부인을 맞아왔다고 한다. 보름웃도가 중국(中國)으로 유람을 갔을 때였다. 양반의 몸으로 아무데나 잘 수가 없어서 조정 대신의 집에서 묵고 있었다. 하루는 주인 대감과 바둑을 두다가 변이 마려워 변소에 가던 중 아리따운 아가씨가 보여 한 눈에 반하고 말았다. 하인들에게 물어보니 주인집 딸이라는 게 아닌가. 보름웃도는 아가씨의 모습이 눈에 삼삼하여 바둑판이 보이질 않았다. 그 자리에서 딸을 달라고 했다가는 목이 달아날 것 같아서 주인이 자리를 비운 틈에 편지 한 장을 써서 바둑판 밑에 놓아두고 집을 나왔다. 사흘만에 들어왔더니 대감이 말했다.

『장부가 왜 입으로 말을 못하고 편지로 합니까』

『나그네가 함부로 말하기 힘들어 그랬습니다』

『어찌 대갓집 딸을 쉽게 내줄수 있소. 바둑이나 두어보고 이기면 내 주겠소』

보름웃도가 바둑으로는 한 수가 위여서 드디어 결혼을 하게 됐다. 선선히 허락한 대감집에서는 성대하게 잔치를 열어 결혼식을 올렸다. 옛날 결혼식에서는 너울로 가려서 신부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그날 밤이 깊어 너울을 걷고 누워 자려고 보니 얼굴에 곰보가 져서 바가지상이었다.

『아이쿠, 처음 본 얼굴이 아니구나』

보름웃도는 질겁을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차마 한 자리에서 자지 못한 보름웃도는 책상에 앉아 글만 읽으며 밤을 새웠다. 날이 새어 하인이 밥상을 들여오니 넌지시 물어봤다.

『거기 있게. 이 집에 처녀가 둘이더냐』
『예 둘입니다』
『나와 결혼한 처녀는 몇 째냐』

『큰 딸입니다』
『내가 본 처녀는 둘째 딸이었구나』

그 때야 진상을 눈치 챈 보름웃도는 세숫물을 떠와도 세수를 안하고 밥상을 가져와도 식사를 안하다가 드디어 처제와 눈이 맞아 고향인 제주도(濟州島)로 같이 도망쳐 버렸다.

큰 부인 고산국은 뒷날 보름웃도가 안보이자 천기운간의 별자리를 보고 둘이 도망친 것을 알았다. 화가 난 고산국은 남자의 복장을 하고 옥황에 축원을 하고 대축기를 올렸다. 대축기는 제주도(濟州島)를 향하여 펄럭였다. 축지법에 능한 고산국은 천근짜리 무쇠활에 백근짜리 화살을 들고 백리길을 오리로 잡아당기며 쫒아왔다. 풍운조화에 능한 보름웃도는 안개를 불러 섬을 덮어버렸다. 고산국이 제주(濟州)에 도착하고 보니 안개가 자욱하여 어데가 어덴지 알 수가 없었다. 한참 만에 정신이 들어보니 층암절벽 끝에 서 있었다. 마침 닭의 모양을 한 말라죽은 구상나무가 있어서 땅에 꼽아놓았다. 새벽이 되어 이 닭이 목을 들어 울고 날개를 치는 통에 안개가 모두 걷혀 섬 한 구석에 숨어 있던 보름웃도와 둘째딸이 들키고 말았다. 고산국의 무용에 질린 두 사람은 한 번만 살려달라고 빌었다. 쫓아올 때는 단칼에 베어죽일 요량이었지만 막상 얼굴을 보니 그것도 못할 노릇이었다.

『아무리 못난들 내 남편인데 어찌 죽이랴』

고산국은 차마 활을 쏘지 못하고 참고 말았다.

『우리 이대로 고향에 돌아가면 남부끄러운 일이니 여기서 살되 동생은 아버지 성을 쓰지 말고 어머니성을 쓰면 한 번은 살려주마』

동생은 어머니 성을 따라 지씨가 되니 「지산국」이라고 불리게 됐다. 고산국이 활을 쏘니 「혹담」에 떨어져 서홍(西洪)동을 차지했다. 남편 보름웃도는 활을 쏘니 서귀포(西歸浦)앞바다 문섬으로 떨어져 하서귀(下西歸)를 차지하고 지산국은 나머지 동홍(東洪)동을 차지했다. 이때부터 세 지역이 땅가르고 물가르게 되었는데 이후 동·서홍(東·西洪)동 간에는 시집·장가도 못가고 밭을 서로 팔고 사지도 못하며 말이나 소도 바꿀 수가 없게 됐다.


한라산신 아홉 형제 중 세째인 서귀포시 호근동의 본향당신은 가죽옷을 입고 버선을 신고 장도칼을 둘러매고 사냥을 하면서 내려 왔다. 서귀포 위쪽 시오름 봉오리에 다다르니 각록이 달린 사슴무리들이 수만마리 서쪽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앞에 가는 것들은 다 놓아두고 맨 뒤쪽에서 따라가는 사슴을 잡아 약돌기(도시락주머니)에 담아 들고 고근산 윗녘 빌레냇가까지 왔다. 냇가에서 머리를 감고 목욕한 후에 고근산에 올라와 보니 세 신선이 바둑을 두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 왔습니까』

『땅 차지, 물 차지, 단골(신앙민) 차지 하러 내려왔습니다』

신선들에게 물어보니 이곳이 바로 호근마을이었다. 지남철(나침반)을 놓아 앉을 만한 자리를 찾아보니 「마불림동산」으로 혈이 뻗어 있었다. 마불림동산은 물이 없어서 좌정할 만한 터가 아니었다. 큰당동산으로, 법환리 「붉은밭」으로 돌아다니던 한라산신은 먹을 물도 좋고 말 먹일 물도 있는 호근리 「돌혹」지경에 자리를 잡았다. 딸 일곱형제를 낳았는데 막내딸이 말을 잘 안듣고 심술이 궂었다. 일곱 살 나던 해에는 견디다 못한 부모들이 작은 대바구니에 넣어서 서천꽃밭으로 죽으라고 던져버렸다. 심술은 궂은 아이였지만 똑똑하기는 그지 없었다.  마침 대정(大靜)고을의 형방이 말을 잃어버렸다는 신고를 받고 말도둑을 잡으러 돌아다니고 있었다.

『대정(大靜)형방놈이 말 찾으러 동쪽으로 가는구나마는 말은 서문밖 탱자나무에 목이 걸려 죽어있구나』

동쪽으로 가다가 아이가 바구니 속에서 하는 말을 들은 형방이 서문밖으로 가보니 정말 거기에 말이 죽어있었다. 신통하게 생각한 형방은 아이를 말 뒤에 태우고 관아로 들어갔으나 귀찮아서 말팡돌 위에 버려두었다. 아무도 돌보지 않아 그 자리에서 죽은 아이는 옥(감옥)할망신이 됐다.


아홉형제중 네째인 중문(中文)동 하로백관[한라산신(漢拏山神)]은 처음에 천제연 물아래 자리잡았으나 사농쟁이(사냥꾼)들이 나들고 산짐승들이 목욕을 해대서 부정이 만만하였다. 그 때 목수질 잘하고 불미질[대장장이] 잘하는 임씨집 임도령이 있었는데 정시[지관(地官)]의 말을 듣고 「도람쥐궤」(박쥐 굴)로 하로백관을 모셨다. 이 하로백관은 쾌자에 구실동이 겹저고리에 대홍단 겹치마, 가막창신, 은비녀, 놋가락지 준비해서 「진궁부인」과 결혼을 했다. 진궁부인이 임신을 하니 일천가지 음식을 해봐도 밥에선 밥내가나고 물에선 물내가 나서 먹지를 못했다. 진궁부인은 산에 갔다오는 길에 사냥꾼들이 산짐승을 잡아 나눠먹고 있는 것을 보고 고기를 한 점 얻어먹고 돌아왔다.

『네 몸에서 어찌 종경내[지린내]가 나느냐』

『신산만산 노용산에 갔다가 사농쟁이들이 분육(分肉)을 햄시니 산뜻하게 사시미 한 점 얻어먹었습니다』

『부정하다. 진궁으로 내려가라』

쫓겨난 진궁부인은 여자아이를 하나 낳았다. 진궁아기는 커 갈수록 행실이 나빠서 무쇠상자에 담아 요왕[용왕(龍王)]황제국으로 귀양정배를 보냈다. 바다로 떠내려가 산호가지에 걸리니 요왕황제국의 개들이 짖어댔다. 요왕국에 들어간 진궁아기는 남자로 오인되어 용왕의 막내사위가 되었다. 그런데 석달열흘을 기다려도 술도 안먹고 내외법[방사(房事)]도 지키지 않았다. 막내딸이 아버지에게 여쭈었다.

『아버님, 얼마나 높은 사위를 맞았길레 석달 열흘 한 방안에 앉아도 여자 남자 구별을 모릅니까』

요왕이 사위를 불러들여 호통을 쳤다.

『엎드려 뻗쳐라, 여자 남자 결혼을 했는데 내외법이 없으니 너는 여자냐 남자냐. 내 딸이 얼굴이 나쁘냐 행실이 나쁘냐. 무엇이 소원이냐』

『이곳이 대국은 대국이라도 우리 소국만 못합니다. 우리나라에선 사위는 손님이라 동창고도 열고 남창고도 열고 낮도 이레 밤도 이레 잔치를 하되 소도 전(全)마리로 잡아 두일레 열나흘 게와시[거지]잔치까지 벌입니다』

『낸들 사위 손하나 대접 못하랴』
요왕국이 잔치준비로 법석인데 병란이 일어났다. 처부모가 선봉대장으로 나설 처지가 되자 진궁아기가 대신 나서서 병란을 수습했다. 요왕이 치사를 하고 소원을 말하라고 했다. 진궁아기는 오곡씨를 타내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천지가 떠들썩하게 돌아온 진궁아기는

『요왕황제국 아기씨한테 장가들고 병난을 잠재우고 천가지 부술(符術)을 받아왔습니다』하고 아버지 앞에서 큰소리를 쳤다. 겁이난 하로백관은 『우리 외딸아기 똑똑하다』하고 「불목당」에 자리를 주어 좌정하라고 했다.

이때부터 불목당에 「진궁부인」「진궁아기」「요왕아기」등 세 신위가 좌정하게 됐다. 이때에야 진궁아기가 여자라는 걸 알아차린 요왕아기는 가슴에 한이 맺혔다. 그래서 이 신에 들리면 폐렴·복막염·간장염이 되고 여자는 하혈을 한다고 한다. 처음에 김씨할머니가 「못동산」에 모셨으나 화재를 당하여 천제연옆 「정동이궤」로 갔다가 부정한 게 많아 도람쥐궤로 같이 모시게 됐다.


다섯째 동백자하로산[한라산(漢拏山)]도는 중문(中文)위쪽으로 돌아다니다가 색달(穡達)리 지경으로 내려와 이 마을「오로코미」동산에 앉았다. 지나가던 김(金)씨호방과 형방등 3명이 하로산도를 발견하고 백보 앞에 엎드려서 색달(穡達)리의 수호신으로 모셔갔다. 이 하로산도는 이 마을 산혈·물혈을 잡고 낳는 날 생산(生産)문서 차지, 죽는 날 물고(物故)문서 차지, 호적·장적(帳籍)을 차지하여 토지관(土地官)으로 들어섰다. 이 신은 천근이 나가는 활과 백근짜리 화살을 들고 팔에는 범의 가죽으로 팔찌를 하고 있었다. 활을 들어 동쪽으로 쏘면 동쪽의 액(厄)이 다 제압되고 서쪽으로 쏘면 서쪽의 액, 남·북쪽으로 쏘면 남·북쪽의 액이 다 제압됐다. 동백자하로산도는 족다리 대서부인과의 사이에 일곱 딸을 낳았다. 큰 딸은 난드르[대평(大坪)리]의 신 「당밭몰리 일레중조」가 됐으며 둘째는 상열리[상예(上猊)리]의 「망밭중조」, 셋째는 거문질[사계(沙溪)리]의 「청밭할망」, 넷째는 「번내왓」[화순(和順)리]의 「원당밭 일레중조」, 다섯째는 통천리[감산(柑山)리]의 「도고새미 일레중조」, 여섯째는 창천(倉川)리의 「닥밭할망 일레중조」, 일곱째는 예래(猊來)동 「전신당 일레중조」로 중문·안덕(中文·安德)일대 각 마을의 여신이 됐다.


남원(南元)읍 예촌[신례·하례(新禮·下禮)리]의 수호신도 하로산도였다. 이 하로산도는 강남천자국의 도원수와 칠오름 도이병서도와 세 신이 같이 마을을 수호했다. 세 신이 마을을 차지하고 있는데 다른 하로산도인 조노기보름웃도가 예촌으로 왔다. 통성명을 하고 보니 조노기보름웃도가 나이가 많았지만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 우리 바둑으로 위·아래를 가리자』

예촌의 하로산도는 바둑도 수가 아래였지만 다른 신들의 훈수를 들어 조노기보름웃도를 이겼다. 바둑에 진 조노기보름웃도는 아래로 내려가 보목(甫木)리의 수호신이 되었다. 세 신은 바둑두기를 좋아했다. 바둑을 두다가 지나가던 박(朴)씨를 발견하여 매해 자신들에게 정기제의를 지내도록 했다. 박(朴)씨가 굿을 하고 있는데 허(許)좌수 허자백이가 말을 타고 당옆을 지나갔다. 말이 갑자기 발을 절더니 쓰러져 죽어버렸다.

『이게 웬 일이냐』
『이 당(堂)은 영기가 세어 굿을 할 때 말을 타고 당 앞을 지나가다가는 말이 발을 절게 돼 있는 당입니다』

『말고기 못먹어 죽은 귀신이로구나』

허좌수는 죽은 말을 잡아놓고 굿을 하도록 했다. 굿이 무르익어가자 큰 뱀이 나타났다. 칼을 들어 머리를 치자 파란색 비둘기로 변해 날아갔다. 허좌수는 그 후 호근(好近)동 집에 가서 살다가 정의(旌義)고을의 좌수벼슬을 했다.

하루는 밤중에 하인이 일어나 『목사가 서쪽으로 순력을 오는 것 같으니 어서 마중을 나가십시오』하고 말했다. 얼떨결에 말을 타고 마중을 하는데 호근(好近)동경까지 가니 군막이 쳐 있는게 보였다. 멀리 엎드려 문안을 하는데

『나는 김녕본향신이다』

『나는 광정당 본향신이다』

『나는 예촌본향신이다』하는 소리가 우뢰같이 들렸다.

세 신이 목사의 행차를 하고 원수를 갚으러 나타난 것이다. 허좌수는 혼절을 하여 쓰러졌다. 뒷날 호근(好近)동의 주민이 피가 낭자하여 쓰러진 허좌수를 발견하여 깨웠다. 눈을 떠보니 군막도 없어지고 목사도 보이지 않았다. 이때부터 허좌수의 자손들은 모두 목숨을 잃고 집안이 기울어 갔다. 아이를 나무그늘에 뉘여놓고 밭에 김을 매던 허좌수의 며느리는 낮이 다 돼도 아이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아 이상하게 생각하여 가보니 아기의 목으로 뱀이 들어가 죽어 있었다. 그 후로 마을에서는 허좌수의 원혼이 드리울까 두려워 당에서 굿을 할 때는 같이 상을 놓아 위하고 남원(南元)읍 위미(爲美)리에서는 허좌수가 거드름을 떨며 마을로 들어오는 장면을 재현한 「허좌수놀이」를 하고 있다. 서귀포(西歸浦)시 색달(穡達)동, 상·하예(上·下猊)동, 남원(南元)읍 남원(南元)·위미(爲美)·하례(下禮)리가 모두 이 신들을 섬기고 있다.

한편 바둑에 진 조노기보름웃도는 토평(吐坪)리 신중(神)부인에게 내려와 보니 부인에게서 종경내(지린내)가 났다.

『무슨 일로 종경내가 나느냐』

『소변을 보러갔다가 돼지고기가 먹고 싶어서 돼지 간을 내어 먹었더니 「먹은 간 씬 간」정신이 없더니 종경내가 납니다』

『부정한 여편이구나. 너는 부정하니 토평(吐坪) 「막동골」로 좌정해라』

조노기보름웃도는 보목(甫木)동에서 새금상따님아기를 작은 부인으로 삼았다. 이 부인은 욕심이 세어 아름 가득 금책(金冊)에 붓과 벼룻돌을 잔뜩 가지고 이 마을의 상·중·하단골[신앙민]의 호적·물고를 차지했다.


지금으로부터 7백24년 전 겨울이었다. 몽고(蒙古)군에 쫓긴 김통정(金通精)과 삼별초(三別抄)잔군이 제주(濟州)에 상륙했다. 이들은 지금의 애월(涯月)·한림(翰林)일대 백성들을 동원, 당시 귀일(貴日)촌위 [현재 항파두리]에 둘레 15리[6km]의 토성(土城)을 쌓고 그 안에 다시 둘레 7백50m의 석성을 쌓았다. 전해에 관군들에 의해 동원돼 섬 둘레로 환해장성을 쌓느라고 생업에 종사하지 못했던 주민들은 다시 항파두리성을 쌓느라고 고초를 겪었다. 먹을 것도 못 먹고 마실 물도 없었다. 노역에 동원된 주민들은 목이 마르면 오줌을 받아먹고 똥을 누고는 다시 돌아앉아 그것을 먹었다. 김통정(金通精)은 또 가호마다 재(灰) 다섯 되, 빗자루 한 자루씩을 세금으로 거뒀다. 성을 은폐하기 위해 재를 성벽위에 뿌리고 빗자루는 말꼬리에 매달아 그 위로 달리게 했다. 성 위로 연기가 피어올라 온 섬을 덮었다.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에 이르자 어디선가 세 신이 나타났다. 이들은 황서·국서·병서라고도 불리고 광양당신·광정당신·서낭당신이라고도 불렸다. 모두 한라산신들이었다. 세 신이 공격하자 수세에 몰린 김통정(金通精)은 무쇠방패를 던져 타고 바다로 날아갔다. 사신용왕(四神龍王)이 깔고 앉은 방패를 잡아당겼다. 김통정(金通精)은 이번에는 매로 변하여 관탈(冠脫)섬쪽으로 날아갔다. 도망다니는 동안에도 김통정(金通精)은 무수히 칼과 활을 맞았으나 죽지 않았다. 김통정(金通精)의 몸에는 온통 비늘이 덮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 신 중의 하나가 모기로 변하여 김통정(金通精)을 쏘았다. 김통정(金通精)이 모기를 잡으려고 팔을 드는 순간 비늘이 일어서자 황서장군이 비늘 틈으로 활을 맞혀 드디어 죽어 바다속에 수장됐다.

애월(涯月)과 한림(翰林)일대에서, 또 대정(大靜)읍 덕수(德修)리, 성산(城山)읍 삼달(三達)리, 안덕(安德)면 동·서광(東·西廣)리 등지에서는 언제부터인지 황서·국서(또는 을서)·병서를 수호신으로 모시고 있다. 세 신은 활을 쏘아 제주·대정·정의 삼읍을 나눠 다스렸다고도 한다. 이 세 신중 하나는 한라산(漢拏山)에서 정좌수따님을 만나 부부가 되어 일곱 오누이를 낳고 이 자녀들은 한림(翰林)읍 일대의 마을수호신들이 됐다고 한다.

황서국서가 한라산(漢拏山)에서 사냥을 할 때 였다. 마침 호근(好近)동 쪽에서 정좌수따님이 나물을 캐러 왔다가 둘이 마주 쳤다. 황서국서는 정좌수딸에게 반하여 붙들고 희롱을 했다. 황서국서도 호걸이었지만 정좌수의 딸도 여걸이었다. 짐배를 끄르는 척 하며 얼른 황서국서를 나무에 묶어 버렸다.

『염치없는 짓 했으니 맛 좀 봐라』

정좌수의 딸은 캐어 놓은 나물을 들고 산을 내려오려고 했다. 나무에 매인 황서국서는 꼼짝없이 굶어죽거나 산짐승에게 잡아먹힐 판이었다.

『아이고 살려줍서』
『내게 누님이라고 부르고 버르장머리를 고치면 살려주마』

『아이고 누님 살려줍서』

정좌수의 딸은 황서국서를 끌러주고 산을 내려왔다. 마을에서는 저마다 정씨집안에 혼사를 들였으나 정좌수의 딸은 모두 거절하고 부모에게 말했다.

『내 남편은 하늘에서 내린 사람이 있으니 다른 사람에게 허락을 말고 기다리십시오』

하루는 비가 퍼부어서 사방이 물천지가 된 날이었다. 한라산(漢拏山)에 사냥을 왔던 황서국서가 마새총(사냥총)을 든 채로 몸이 쫄딱 젖어서 거지꼴이 되어 인가를 찾아왔다. 정씨집에 들어오자 정좌수의 딸이 말했다.

『아버님, 저것이 내 남편될 자입니다』

그래서 황서국서와 정좌수의 딸은 부부가 되었다. 이들은 한림(翰林)읍 금악(今岳)리의 수호신이 됐으며 부부사이에는 일곱 오누이가 태어났는데 큰 아들은 동명(東明)리 종구실 고와니 축일(丑日)한집이고 둘째 아들은 명월(明月)리 하원당 축일한집, 세째는 천아오름의 남문밭당 축일한집이 됐다. 네 딸중에 큰 딸이 한경(翰京)면 조수(造水)리 산대받이 사신용궁도 축일한집이 되고 둘째가 저지(楮旨)리 당동산 중허리의 일뤠중조, 셋째가 한림(翰林)읍 상명(上明)리의 느지리 캔틈 축일한집, 막내가 금악(今岳)리 고련동의 갯거리 마봉오지 축일한집이 됐다.


애월(涯月)읍 고내(高內)리 「황서장군당」에는 황서장군을 섬기다가 신이 돼버린 사람도 있다. 조선 숙종(朝鮮 肅宗)때 세금이 과다하게 부과될 때였다. 이 마을 고흥석(高興碩)은 고기잡이배를 들고 가서 제주성(濟州城) 밖에 팽개치고 목사에게 소리쳤다.

『고내(高內)사는 고흥석이 주세(舟稅)를 납부할 수 없으니 배로 받으시오』

고흥석(高興碩)의 힘과 배짱에 놀란 사또는 이때부터 주세를 받지 않아 백성들이 편안했다고 한다. 이 사람은 「세칫하르방」이라고 불렸으며 이 사람이 가는 곳에서는 신만이 할 수 있는 기적적인 일들이 일어나 마을 사람들은 황서장군과 함께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시고 있다.


출처 : 그대 머물고 간 자리(http://blog.empas.com/daraon/4811095)에서 퍼옴 

출처 : 호근모르(HOGNMOR)
글쓴이 : hognmor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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