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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야그/오 름 야 그

서홍 8경 답사 - 20090228

by 오름떠돌이 2009. 3. 2.

요즘 서귀포에서는 "올레"가 뜨고 있는 중입니다.

 

 

기자 출신인 서명숙씨가 사단법인 "제주올레"를 만들어 서귀포의 동쪽 끝에서 부터 서쪽 끝까지

총 11개의 코스를 개설하였고, 관광객들의 호응이 아주 좋습니다. 

 

 

이에 편승하여 서귀포시를 비롯한 각종 공기업에서도 올레코스를 체험하고 홍보에 주력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에 서홍동에서도 2008년 주민자치 책자를 만들며 "서홍 8경"이라는 서홍동의 명소를 발굴하여 홍보하고자

8경을 잇는 코스를 개설하려 2월 28일 저희 산악회와 합동으로 서홍8경 답사에 들어갔습니다.

 

 

 

 

올레코스 7-1과 연계시키기 위하여 출발지는 "하논"으로 정하여 집결하였습니다.

 

 

 

 

 

 

서홍동 주민센터 직원들과 저희 회원들 총 15명이 하논 입구에서 출발합니다.  

 

 

 

 

 

 

 

 

 

 

 

제주도 서귀포시 서홍동에 있는 마르형 분화구를 말하며 산굼부리 분화구와 함께

제주도 지역의 대표적인 마르형(型) 분화구이다.

 

마르는 화구(火口)의 둘레가 둥근 꼴의 작은 언덕으로 둘러싸여 있는 화산을 일컫는다.

바닥 면적은 21만 6000평, 너비는 1,000~1,500m이고, 높이 10~15m의 언덕으로 둘러싸여 있다.


5만~7만 6000년 이전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마르형 화산지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바닥에는 5만여 년 동안 형성된 깊이 7m의 습지 퇴적층이 있어

시대에 따라 식생과 기후가 어떻게 변화되었는가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대형 분화구이자 이중화산이며,

바닥에서 하루 1,000~5,000ℓ의 용천수가 나와 500여 년 전부터 벼농사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하논은 큰 논을 뜻하는 우리말 '한 논'에서 유래한다 

 

 

 

 

 

 

 

 

 

 

 

 

 

 

 

 

솜반내는 홍로천(烘爐川), 연외천(淵外川)이라고도 하며 하류에 물을 이용한 논밭이 케가 만들어져 있고,

두개의 큰 다리가 놓여 교통의 편의를 주고 있다

 

물이 흐르는데 따라 종남소, 고냉이소, 도고리소, 나꿈소, 괴야소. 막은소 등의 웅덩이가 형성되어

소가 많아서 솜반내라 이름이 되었을 듯 하다.

생수가 상시 흐르지만 담수어는 없고 게가 서식하고 있을 뿐이다.


서귀포시는 지난 2000년부터 천지연폭포 상류인 서홍동 `솜반천' 주변을

어린이들이 하천 생태계를 체험하는 공원으로 만들기 위해 국비 11억4천만원 등 모두 19억원을 투입,

2002.05.27일 정비사업을 마쳤다

 

시는 하천변에 무질서하게 들어섰던 주택부지 15필지 6천471㎡를 매입해 정비했고

피크닉장 2곳과 목재 산책로 734m, 인공 수로 100m, 파고라 15곳, 나무다리 2곳 등을 갖췄다

 

또 구실잣밤나무, 담팔수, 먹구슬나무 등 향토수 14종 613그루를 식재했으며

탐라산수국, 털머위, 감국 등 모두 13종 5만여그루의 야생화를 심었다.


환경부는 자연생태계가 잘 보전됐거나 훼손된 생태계를 성공적으로 복원한 사례로

광주 북구 덕의동 석저마을, 대전 대덕구 법동생태공원,

제주 서귀포시 솜반천생태공원 등 13개소를 선정했다.


그린시티 부문 공동대상을 받은 서귀포시는 환경친화적인 도시를 가꾸기 위해

전 도시의 공원화 사업과 함께 380억원을 투자해 시민의 젖줄인 연외천을 복원하기 위해

솜반천, 걸매ㆍ천지연재해지구를 생태공원으로 조성했다

 

이 결과 오염으로 모습을 감췄던 참게, 송사리, 다슬기 등 수중생물이 서식하고

백로, 원앙 등 조류가 찾아오는 등 시민의 생태학습장으로 변모했다

특히 솜반천은 2004년 2월 환경부에서 생태복원우수사례로 지정됐다 

 

 

 

 

 

 

 

 

 

 

 

 

 

 

 

예전에 한질(大路)에 있었던 홁담길을 동으로 굴왓모루에서 서쪽으로 맥수물내 사이의 길가에

큰 소나무가 길게 뻗은 가지로 양팔을 벌려서있는 듯이 한 줄로 곧게 심어져있다

 

이 소나무는 구한말 1910년경에 당시의 향장 고경천 진사의 착상에 의해 마을 주민들이 심은 것인데,

마을에 재화(災禍)가 자주 일어나는 까닭이 마을 앞이 너무 트인 탓이라 여기고

그 허실한 데를 막아 보하는 뜻에서 심어진 것이다

 

소나무가 심어지기 전에 이곳에 둑을 쌓아 담처럼 된 홁담이 있었다

마을 지세가 화로모양으로 화기가 세어서 집에 불이 잘 일어나므로

불은 물로 재운다는 풍수의 이치에 따라 둑을 쌓고 물이 고이도록 하여 화기를 누른 것이었다

 

홁담을 만들고 화기는 재웠지만 둑이 낮아 위쪽의 모루의 기세에 미치지 못하므로

크게 자라는 소나무를 심어 상합(相合)을 이루도록 한 것이다

 

운치 있고 온후(溫厚)한 기품(氣品)으로 마을을 수호하고 있는 홁담 큰 소나무,

오랜 풍상에도 강건(强健)히 지켜 서있는 그 은덕과 선인들의 혜안에 마을은 평온히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 안길 앞내 다리의 서쪽 길가에 한 그루의 큰 개먼나무가 서 있다

사철이 푸른 상록교목으로 겨울과 봄 두 계절을 팥알만 한 빨간 열매가 팥볼래처럼 덩어리져 있는

운치(韻致)가 일품이다

 

냇가에 자연생으로 언제부터 있어 온 것인지 연륜을 알 수 없는데 표지판에는 160년으로 적혀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나무가 서있는 맞은편 위쪽에 이전에 상여(喪輿)집이 있었고,

상여집과 연관시켜서인지 영험(靈驗)이 있는 신목(神木)으로 알려지고 있다

 

1975년 마을에서 보호가치가 있다하여 축대를 쌓고 주변을 정리하여 표지판에 ‘마을나무’라 했었다

그때 제주대 농대의 자문을 얻어 수령(樹齡)을 350년으로 표시한 바 있다 

 

 

 

 

 

 

 

 

 

 

 

 

 

 

 

 

 

 

 

'목축지'로 가는 서쪽 길의 '정도' 가까운데 있는 서홍동 2450번지 일대이며,

꼭대기에 '들음돌' 같은 큰 돌이 얹어져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모루'는 동산을 뜻하는 제주어이다.


서쪽으로 '여흔계'가 있고 남쪽으로 '눌왓동산'이 있으며 과거에는 대부분 목장이었으나

현재는 과수원 지대가 형성되어 있다.


2007년 9월 살기좋은 마을만들기 사업의 일환으로 사업비 2,900여만원을 들여 산책로 조성사업을 끝냈다

 

 

 

 

 

 

 

 

 

 

 

 

 

 

 

 

 

 

 

 

 

 

고려예종때 송나라 왕이 고려의 지세와 산세가 특이한 형국을 감지하여

호종단에게 고려의 지혈을 단맥케 하기위하여 제주로 보냈다

 

왕의 지시를 받은 호종단은 제주의 서쪽으로 상륙하여 수맥을 끊으며 홍로마을(서홍동)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에 앞서 홍로마을의 한 농부가 밭을 갈고 있는데 백발의 노인이 위급한 표정으로 다가와서

 

"지금 자신이 쫓기고 있는 상태이므로 감추어 주시고 누가 찾아와 묻거든 모른다고 해달라”는

부탁을 하므로 농부는 그 백발노인을 소길마로 덮어주었다

 

곧이어 호종단이 큰 개한마리를 데리고 이곳에 나타나 밭가는 농부에게

“이 근처에 꼬부랑 나무 밑에 헹기물이 있다는데 모르냐?”고 묻자

 

농부는 수상히 여기며 모른다고 대답했다

호종단은 부군에서 ‘꼬부랑 나무밑 헹기물’을 찾았으나 끝내 찾지 못하고

분한 마음으로 가지고 있던 술서가 틀렸다며 찢어버리고 돌아갔다

 

호종단이 돌아간 후 농부가 소길마를 들어보니 숨겼던 백발노인은 간 곳이 없고

그 자리에는 한 그릇의 헹기물이 남아있었다

이 물을 그 자리에 부었더니 계속해서 맑은 물이 솟아나 지금의 지장샘이 된 것이다

 

앞서 말한 백발노인은 지장샘의 수신(水神)이었으며 꼬부랑 나무밑이란

소길마 가지가 꾸부러진 것을 가리킨 것인데 호종단은 이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수맥을 끊지 못하고 돌아간 것이었다

 

 

 

 

 

 

 

 

 

 

 

성당 녹나무

1900년경 서귀포성당에 근무중인 엄타가신부는 원예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어

건물을 지으면서 조경은 스스로 했다고 합니다.

 

그 당시에 심어진 녹나무인데 수령이 200년이 넘어가는 데도  아직도 푸르름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마을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으며 성당에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밀감은 한국에서도 오래 전부터 재배되었다고 전하나 확실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고,

일본 야사(野史)인 《히고국사[肥後國史]》에 삼한(三韓)으로부터 귤(橘:Tachibana)을 들여왔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고려사세가(高麗史世家)》에는 1052년(고려 문종 6)에 탐라에서 공물로 바쳐오던

감귤의 양을 100포(包)로 늘린다고 하였다. 그 후 조선시대에는 더 많은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세종실록》에는 1426년(세종 8) 경상도와 전라도 남해안 지방까지

유자(柚子)·감자(柑子)를 심어 시험 재배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탐라지과수총설(耽羅誌果樹總說)》에는 1526년(중종 21)에 제주목사 이수동(李壽童)이

감귤밭을 지키는 방호소(防護所)를 늘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외에도 많은 문헌에서 감귤의 재배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으나

오늘날 남아 있는 재래종 감귤은 10여 종에 불과하다.


지금 주종을 이루고 있는 온주밀감은

1901년 신축년의 난이 이후 꾸준히 교세를 확장하여 온 천주교 서홍성당(현 복자수도원)에 근무하던

 

엄타가신부가 식물연구를 해오던 중 왕벚나무의 자생지가 제주도임을 세계식물학계에 보고하여 인정을 받고

1911년 제주자생 왕벚나무 몇 그루를 일본에 있는 친구에게 보내준 답례로 받은

 

미장온주 14그루를 기중 받아 시험재배하게 된 것이 제주 온주밀감의 시초이다

현재까지도 현 천주교 복자수도원 앞마당에 당시 나무 중 2그루가 남아있어 수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