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목동 가시선인장처럼
문상금 - 보목동 가시선인장처럼 - 서귀포신문 - 문필봉 - 2012년 9월 16일
보목동 가시선인장처럼
<문필봉>시인 문상금
2012년 09월 16일 (일) 20:15:07 서귀포신문 webmaster@seogwipo.co.kr
삽화/정지란.
무화과 잎으로 가리기에는
이미 알아버린 사랑이 부끄러워
모래언덕에 숨었습니다
풀 한 포기 물 한 모금 없는 이곳에서야
더 이상 부끄러운 속내를
들키지 않으리라 믿었습니다
은빛모래 봉긋한 가슴위로
별빛 한 점 없이 쏟아져 내리는 한여름밤
잠들 수 없는 열정이
가시로 돋아나고 있습니다
나기황 시인의 ‘가시선인장’이란 시다.
하늘과 땅이 한 몸이 되어 비바람치고 나무들이 흔들리고 바다가 뒤집혀 허연 속살을 들어낼 때면 가만히 앉아 글을 제대로 쓸 수가 없다. 내 영혼도 나뭇잎처럼 마구 하늘과 땅을 날아다녀 이리저리 쏘다녀야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는 것이었다.
얼마 전 ‘볼라벤’이 불어올 때는 제지기 오름 앞바다에 오래도록 서 있었다. 섶섬 앞과 동쪽으로 집채 만 한 너울이 허옇게 바다를 뒤집으며 다가오곤 하였다. 방파제 옆 빨간 돈키호테 등대를 금방 뒤덮고 하얀 거인 같은 그것들은 해안가 자갈돌에 부딪혀 하나씩 소멸해갔다. 또 가만히 귀 기울이면 그것들은 우우거리며 내 영혼에 부딪혔다가 다시 시커먼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폭우로 쏟아져 내렸다. 마치 투명인간처럼 형체도 없이 그 진한 향기 같은 울림만 남아 내 영혼 속으로 깊이 파고 들어왔다.
그 해안가 부서지는 포말을 따라가다가 자갈돌 너머 조그만 모래밭에 뿌리내린 손바닥 가시선인장 군락을 만났다. 아주 오래된 영혼의 손바닥 물집마다 피어난 노란 선인장 꽃, 한림읍 월령리 선인장 군락지나 사계바다에서 만났던 그것들과는 또 다른 뭉클한 느낌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멕시코가 원산지인 선인장이 쿠로시오 난류를 타고 여기 보목동 해안까지 밀려와 수백 년 동안 둥지를 틀었다는 사실에 눈물이 났다. 울퉁불퉁한 물집과 상처들을 하나씩 어루만져 주었다. 이렇게 외로움을 견디고 악착같이도 잘 살아있었구나, 결국 살아간다는 것은 험한 산을 오르는 것이다. 저마다의 탑을 쌓으며 결코 서두르지 않으며 한 발 한 발 걸어가는 것이다. 손바닥엔 솜털 같은 가시들이 잔뜩 박혀 따끔거렸다.
그 날은 비바람 불어대는 소리 들으며 밤새도록 시(詩)를 썼다.
나는 보목동 가시선인장
칭칭 그리움으로 뿌리내린다
북태평양 떠돌던 씨앗 한 톨 보목 바닷가에 뿌리내린다
하얀 파도가 내 몸을 밀어낼지라도
자갈돌 짠 틈새에 하얀 뿌리 악착같이 문어발 내린다
때로 그대 다시는 사랑을 안 할 것처럼 외면하지만
오래 뜨겁게 사랑을 하여 기필코
손바닥 같은 분신들을 셀 수 없이 터뜨릴 것임을 예감하나니
그대 폭풍처럼 질주하리라
섶섬 바다를 날아올라 태양처럼 이글이글 타오르리라
나는 쓸쓸히 불타는 보목동 가시선인장